사랑 때문에 결혼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낚인 것이다④
앞서 이야기한 진화론자들과 쇼펜하우어의 주장이 100% 맞는다 쳐도 문제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생식이 전제되지 않은 즉 2세 생산이 전제되지 않은 사랑마저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적으로 결함이 뻔히 보이는 그런 무모한 사랑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단순히 그냥 일반적 개념의 동물이라면 진화론자들과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별다른 이견 없이 모두 맞는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진화론자들과 쇼펜하우어의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동물과 다른 영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일반 동물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그 이상의 예외들이 존재하게 된다.
육체적 약자인 장애를 가진 남성이나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 빈털터리에 사회적 능력도 없는 남자에게 반한 여자들, 추할 정도로 못생기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폐경기조차 지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들, 아이 생산이 불가능한 열렬히 사랑하는 동성애자들을 진화론자들과 쇼펜하우어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인간이 단순히 진화론자들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일반적인 개념의 그런 동물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한테는 동물에게 없는 분명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인간이 끝내 동물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필자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무수한 종교와 철학, 사상 등등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플라톤은 그의 저서『향연』에서 인간은 완전성을 향해 가는 에로스적 존재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필자는 인간을 중간자적 존재로 이해하고 끊임없이 완전성을 희구하지만 영원히 완전성에 도달하기 못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플라톤의 인간에 대한 이해 방식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인간이 중간자적 존재로 보이고 그가 희구하는 완전성이 도달 불가한 그 무엇처럼 보인다 해도 인간은 결국 그 현실적 어둠을 뚫고 자신의 완벽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완전성을 가진 존재라고 필자는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치명적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얘기한 인간이 에로스적 존재라는 부분이 매우 적절한 한 예로 사용될 수 있을 듯하다. 인간이 열망하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바로 이 완전해지고자 하는-동양 사상에 의하면 완전성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치명적 사랑의 난제는 의외로 쉽게 풀리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도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망, 인간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이 두 욕망을 향해 질주하며 그들의 사랑과 결혼에서도 이 두 가지 욕망을 작동시키게 된다.
육체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에는 진화론자들과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2세를 위한 생식 행위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가장 완전한 2세를 위한 유전자적 조합,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완벽하게 보완해 줄 상대방에게 아마도 자연스럽게 반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들이 꿈꾸고 원하는 2세가 탄생하지 못하는 오류가 간혹 나타나기도 하고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처럼 열성 유전자로 뭉쳐진 2세조차 낳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바로 그들의 유전자적 끌림 그 자체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생식이 불가능한 그리고 뛰어난 유전자의 조합이 불가능한 이들의 사랑은 육체적으로 완전해지고자 하는 열망이 아닌 정신적으로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표현의 한 방식일 수 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은 어떤 의미에서 2세 생산을 통해 완전한 유전자의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동물적이고 기본적인 욕구보다 훨씬 강렬하고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