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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Sep 11. 2021

점묘도

 그 사람과 싸웠다. 싸움 후엔 언제나 정적 그리고 자꾸 들여다보다가 이젠 시야에 비치는 것도 싫어진 아픈 기억이 남는다. 온종일 머릿속이 단순해지고 단순한 의식을 타고 무수한 감정들이 파도를 친다. 남은 하루가 시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세상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내 감정만 남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음이 가라앉으니 밤이 되었다.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앞쪽 베란다와 뒤쪽 세탁기실 창문을 닫기 위해 부산스럽게 일어났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왔다. 다행히 베란다는 이중창이라 안쪽 문을 닫아놨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바깥쪽 덧문까지 굳게 잠갔다. 서두르느라 슬리퍼도 안 신고 베란다 바닥을 밟았다. 화분에서 떨어진 흙이며 오늘 집안으로 기어들어온 먼지들이 자글자글 느껴졌다. 는 아직도 몽롱한 마음을 추스르며 가만히 유리문을 바라본다. 내가 자는 동안 이미 한참을 빗속에 서 있던 안쪽 창문은 송골송골 뜨거운 이마를 훔친다. 맺혔던 빗방울들이 창틀로 떨어져 먼지 속에 스미는 것이 보였다. 뭔가 큰일이 끝난 뒤의 정적이 있는 안과 다르게 바깥은 장대비가 정도도 모르고 줄기차다. 비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꿈이 깨는 듯하다 그제야 손등에 묻은 방울들이 차갑게 느껴진다. 끝에 닿는 물방울의 감촉이 진해짐에 따라 어제 일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내가 무심코 했던 말들, 그 말들에 상처 입은 사람, 그 사람과 싸웠던 일까지. 착잡한 마음을 이끌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애써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한번 놓친 황홀한 꿈은 이미 입에 못 댈 정도로 쉬어버린 후였다.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을 차렸다. 대체 어느 시점에 쓰러진 것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화는 한동안 울리다가 곧 꺼졌다. 핸드폰을 들고 부재중을 확인했다. 친구가 전화를 했다. 아마 어제 일을 풍문으로 들은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요란하게 싸웠으니 알 수밖에. 나는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도 피곤함을 느꼈다. 근데도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다 보니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고요해진 세상이 궁금해 베란다에 나가본다. 안쪽 창에 얼룩진 자국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 바깥 창에 똘망똘망 맺힌 빗방울들이 보인다. 밤새 말라가며 남은 얼룩과 하늘에서 갓 떨어진 방울들이 이중으로 겹쳐 보이며 이색적인 풍경을 이루었다. 꼭 전날 칠을 하고 말려두었던 캔버스에 다시 덧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 프레임을 통해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본다. 또 단지에서 출발하는 자동차와 찻길가에 버스 정류장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오늘 내가 나설 길을 찬찬히 짚어본다. 어제와 지극히 다를 바 없는 풍경이지만 어렴풋이 생기가 어려있다. 빗방울을 머금은 단지 내 초목들이 조금 흥분한 듯 상기되었다. 어제는 보슬비를 뚫고 내달리던 사람들이 오늘은 우산을 하나씩 챙겨 나온다. 온종일 한껏 울상 짓던 하늘이 지난밤 모든 체액을 쏟아내고 새로운 기분으로 가벼이 떠 있다. 무엇이라도 흡수할 수 있을 것처럼 보드라워 보인다. 어제 뿐이었던 어제와 오늘이 더해진 오늘은 다르다. 이 모든 풍경이 창과 창을 통해 내 눈으로 마음으로 와닿는다. 어제의 창과 오늘의 창이 고요히 분주한 이내들을 배경 삼아 점묘[點描]를 이룬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핸드폰을 찾는다. 시간을 확인하니 지금쯤 씻으면 늦지는 않는다. 또 가야 할 길이고 또 봐야 할 얼굴들이니 지금 나의 서정적인 감정을 앞세워 비운의 주인공처럼 집에 틀어박힌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차라리 감정을 다잡고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다툼의 시작은 어디였는지, 어제 의식을 잃기 전 무슨 고민을 했는지, 비는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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