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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갑수 Oct 06. 2021

시간의 문법 8 [完]

단편 소설

-이번 주 로또 번호가 뭐냐?

-루프가 돌면 어차피 다시 빈털터리가 될 텐데요.

-상관없어. 하루를 살더라도 즐겁게 보내면 그만이야.

-다음에 알려 드릴게요. 신경을 안 써서 기억이 안 나요.


나는 면접을 보러 가기 전에 이모부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줬다. 1등에 당첨되면 뭔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2등 번호를 알려줬다. 이모부는 토요일에 로또에 당첨되었고, 월요일에 당첨금을 찾아 1박 2일 동안 다 써버렸다. 뭘 어떻게 하면 하루 만에 수억의 돈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완전히 다른 텍스트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면접을 보기 전에, 그러니까 화요일에 내정자들을 죽이면 어떨까요? 그 사람들 어차피 사회악이잖아요?

조력자가 말했다.


어쩌면 그 극단적인 방법이, 내가 이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나쁜 것은 맞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조력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팬은 요즘도 매주 면접 예상 질문지를 읽고 있다.


나는 도서관에 갔다.


습관일 수도 있고, 아니 사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계속 일주일이 반복된다면 뭘 해도 금방 질린다. 1년은 52주다. 다행히도 도서관에는 5200주 동안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많은 책이 있었다.


나는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표지가 예쁜 책, 첫 장이 재미있는 책, 전에 봤던 작가의 다른 작품 따위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텍스트는 안쪽이 바깥이다. 안쪽에는 텍스트가 없다. 그러니까 텍스트 안의 인물들은 텍스트를 모른다는 전제 아래 행동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재난을 다룬 작품을 보면, 대개 위험을 경고하는 과학자가 나온다. 과학자는 지진이나 화산폭발, 해일, 바이러스의 위험을 알리고, 빨리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멍청한 정부 관료나, 시장 같은 사람이다. 그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를 들며 시민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사고를 키웠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이게 현실이라면 어떨까? 현실의 정부 관료나 시장은 뭐가 됐든 위에서 말한 식의 재난을 다룬 작품을 봤다. 그리고 전에 과학자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피해가 커진 과거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현실의 정부 관료와 시장은 재빠르게 시민을 대피시킨다. 설령 과학자의 경고가 틀려서 재난이 일어나지 않고, 경제적, 정치적인 피해가 발생해도 어떤 시민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재난을 다루는 작품 속에는 멍청한 정부 관료가 나온다. 그는 아무것도 본 적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사례는 끝도 없이 많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자기 진짜 부모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사실은 여동생인 것을, 음모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알아차린다. 모든 게 밝혀질 때까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세계에는 막장드라마가 없으니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르다. 미리 규칙을 배우고, 그것을 어기거나 바꾸면서 행동할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좋은 피난처이기도 하다.


요즘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너무 많이 읽은 탓에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텍스트가 없는 세계에 텍스트를 만들어 넣으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벗어날 수 없어도 큰 상관은 없다. 바깥도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무엇보다 이 생활도 나쁘지가 않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지 모르겠다.


아쉬운 것은 내가 몇 번이나 이 루프를 돌았는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이 첫 번째는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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