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사회 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구분과 통제인가
한 달 정도 미국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워싱턴 D.C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버스였는데, 나까지 포함해 총 10명이 타고 있었다. 이 중 4명은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와 고작 해봐야 1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이, 그들의 부모로 한 가족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기도 전, 어린 아기는 이미 오늘의 여정이 자신의 울음소리로 채워질 것임을 우렁차게 표현했다. 그 가족의 뒷자리에 앉았던 한 승객은 2층으로 일찌감치 올라갔고, 그 외 사람들은 잠시 울다 말겠지 하며 자리를 지켰다. 정말 쉼없이 울음소리를 내던 아기는 도착할 때까지 지칠 줄을 몰랐고, 나는 그 큰 소리보다 아기의 엄청난 체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정말 놀랐던 부분은 같은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심지어 기사님께서도 이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만약에’는 항상 주관과 비약이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아마 말은 안 하더라도 누군가는 표정을 구기거나, 또 누군가는 일행과 함께 수군댄다거나, 아니면 정말 조용히 좀 해달라는 한 마디가 나왔을 수도 있다(물론 상황,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당연히 이 사례만 보고 미국 사람들이, 더 나가서 으레 과장을 하듯 “역시 외국인들은 인내심이 강해~” 같은 사대주의적인 무조건적 칭찬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달 간의 생활을 통해 분위기로 느낀 점들과 실제로 경험한 것들, 대화를 나눈 것들을 통해 보면, 사회에서 아이가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가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대부분의 공간 설계에 있어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참 잘 적용되어 있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건물에는 여닫이 문도 자동문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화장실이나 공원 등 다양한 공공시설에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그 공간을 향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지만, “여기에도 이런 게 있다고?” 싶은 공간에서도 이러한 배려들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참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큰 차이점은 스트롤러(Stroller), 유모차와 같은 이동수단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를 위한 공간 설계가 되어 있는 것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고, 그래서 정말 중요하게 봐야 하는 점은 인식에 대한 부분이다. 나는 1년 중 사람이 제일 많이 몰리는 시즌인 연말에 뉴욕을 갔는데, 정말 모든 곳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관광지가 아닌 곳들임에도 기본적으로 2배 이상의 인파가 몰린 느낌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곳에서 유모차, 또는 전동차를 보는 것은 손에 꼽을 일이다. 12월 말 주말, 사람이 제일 몰릴 홍대, 신촌, 성수 등에 유모차와 전동차가 얼마나 보일지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미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어디를 가도, 심지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도 가도 못했던 브루클린 브릿지에도 종종 발견됐다. 그런데 그때마다 놀라웠던 것은 항상 그들을 우선시 하고 배려했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에도 스트롤러가 보이면 멈추고 먼저 보내주었다. 내 솔직한 심정은 “사람이 많이 몰릴 걸 뻔히 알면서 왜 유모차를 가져와가지고 복잡하게 만들지?”였는데, 사실 내가 좀 더 기다려준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배려를 배우고 사회화가 되고 있었다.
뭐 이런 저런 사례들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노키즈존’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인식은 좀 다르다고 느껴진다(거듭 말하지만 이게 실제 연구도 아니고 그냥 뇌피셜에 기반한 감상이기 때문에.. 다른 말 들어오면 그냥 인정한다.). 한국의 노키즈존은 이런 느낌이 든다. 나의 편안함과 공간에 대한 기대가 어린이들의 시끄러움과 난잡함, 정신없음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곳, 그러기 위해 아이들을 입장할 수 없게 만든 곳. 사실 공공질서의 관점에서 ‘노키즈존’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키즈’들이 소위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잘 있다 간다면 과연 ‘노키즈존’이 생겼겠냐는 것이다. 즉,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아이들이 바뀐다면 ‘노키즈존’은 없어질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재밌는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바뀔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또한 이루기 참 어려운 부분이다. 상식적으로 어른이 아이들보다 더 잘 인내하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본다면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찌 되었건, 미래 세대인 아이들은 우리가 잘 보살펴 성장시켜야 하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인식이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세대가 앞 세대의 가르침과 보호 속에서 커 온 것처럼 그들에게 똑같이 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손이 많이 가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오늘 하는 말들이 무조건적으로 아이들을 오냐오냐 해주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는 아이를 더욱 더 용인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어야 하지만, 가정의 영역에서, 특히 훈육의 영역에서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쳐야 하고, 부모는 아이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회에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올바른 덕이 바탕이 되어 자란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필요하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감축할 수 있다는 점도 견지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사회적 구분과 분류를 통해 자라는 친구들이 보다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