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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Feb 06. 2024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_책과 영화 사이

Where the Crawdads Sing, 2022



이미 읽은 책이 원작인 영화는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몇 번의 경험에 불과하지만 그런 영화를 보고 실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 왜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영화를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다가- 불현듯 나의 편협한 생각을 탓한 적이 있다. 세상엔 영화가 된 그 책을 읽은 사람보다 읽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고, 이미 책을 읽은 사람들조차도 영화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보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보다 훨씬 아름다운 영상을 담을 수도 있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덕분에 캐릭터가 더욱 살아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영화와 책이 주는 만족도의 비교는 '질보다는 양'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영상물에 수백 페이지의 책을 넣는다는 건, '골라주는 대로 먹어'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의 차이라고나 할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 Where the crowdads sing 은 동명의 소설(2018)이 원작이다. '델리아 오웬스'가 69세에 쓴 첫 장편소설이다. 그녀의 나이와 '첫'소설이란 걸 재빠르게 묶어서 헛된 희망을 갖는 건 금물이다. 글은 단순노동과 비슷해서 결과에 정직하다. 글의 뿌리가 생각과 경험치인 건 사실이지만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종류를 막론하고 얼마나 오래 꾸준하게 써왔느냐에 따라 문장력이 달라진다. 이 책이 그녀의 첫 소설이긴 해도 동물행동학자인 그녀는 이미 여러 권의 전문 서적을 내고 수상한 경력도 있는 과학자다. 그래서 책의 배경이 된 습지의 곤충이나 새들의 생태와 그것을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입시키는 표현들이 남달리 탁월하고 아름답다. 경험만큼 강하고 대체불가의 설득력을 지닌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책을 먼저 읽었다. 나중에 영화 제작에까지 참여한 영화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자신의 북클럽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진 이 책은 150주라는 경이적인 기간 동안 베스트셀러였고, 2023년 4월 기준으로 1,8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베스트셀러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협한 독서적 체질이지만 먼저 책을 읽은 아이가 엄마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며 권해서 읽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 어디까지 읽었는지 자꾸 묻는 아이의 표정에서 뭔가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부분이 있다는 걸 눈치챘었다.


우리는, 한두 번쯤 혹시.. 하다가 설마..로 돌아서곤 했던 결말에 놀랐고, 전체적으로 아름다움 묘사에 비해 대사나 사랑에 대한 표현이 낯간지럽다(아마 논문 같은 것만 쓰다가 소설을 처음 쓴 분이라..)는 것과, 무엇보다도 어느 한 장면에 대해 '좀 억지스럽고 유치한 설정'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카야의 엄마가 남긴 그림에 관한 부분인데 다행히 영화에는 없다. 책과는 다른 결을 지닌 설정이 몇 군데 있어서겠지만 특히 이 부분이 없어서 영화가 책보다는 더 세련되고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사실 그리 중요한 부분도 아닌데 우리끼리 저자를 놀리는 대목이 된 건,  아이와 내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즐거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딱히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우연히 넷플릭스에 뜬 걸 보고 망설이던 중에 영화가 사라졌다. 우습게도, 마치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먹으려고 아껴둔 맛있는 간식을 누군가 먼저 먹어버렸을 때 느끼는 속상함 비슷한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기어이 '아마존 프라임'에도 있다는 걸 알아내고 바로 보기 시작했다. 책을 먼저 읽었으니 아마 이번에도 인간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쉽고 치명적인 약점인 '비교'의 늪에 빠질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 하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좋았다. 몇 가지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미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도 큰 불만은 없는 영화였다.



사실 초반엔 살짝 당황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색조의 무게감과 설정이 책보다 지나치게 밝고 '살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극적인 성장 스토리를 위해 필요했던 가정폭력과 불안하고 배고프고 외로운 상황들이 마치 표정을 바꾸고 딴 사람인척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아름다운 장면의 유혹에 빠진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책은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읽으며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어린 카야가 나의 상상보다는 훨씬 덜 힘들고 덜 불행해 보여서 좋았고, 성장한 카야 역의 '데이지 에드가 존슨'이 너무 아름다워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책을 읽을 땐, 거기서 어떻게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살았을까 싶었던 부엌과 침실마저 너무 예쁘고 내 취향이라 다른 스토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도 이질감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았던 아쉬움도 있다. 책 속에 나오는 비밀공간인 책 읽는 오두막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도 언제 나오려나.. 어떤 모습으로 나오려나.. 기다렸다. 카야에게 꽤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그런 장소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작용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겐 언제나 나만의 공간, 일명 동굴이 필요하고 책 속의 그 작은 오두막은 아주 탐나는, '소도'같은 곳이었으므로.


영화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나가던 소년 두 명이 늪지에 쓰러져 있는 체이스라는 동네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그를 죽인 범인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범인을 밝히려는 재판 과정이 영화의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둘었다. 영화는 철저하게 카야의 삶에 집중되어 있어서 살인과 법정 스토리라는 묵직한 화두조차 어찌어찌 치뤄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에피소드가 될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 카야를 둘러싼, 가정폭력, 왕따, 이별, 외로움, 성장, 자립, 배신, 사랑, 편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자연, 기타 등등의 것들에 한눈이 팔려 따라다니는 동안 재판은, 가장 이상적이라 할만한 결론을 내며 끝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기전까지는.... 끝부분에 반전이 숨어있다. 그러니 이미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성장한 카야가 얼마나 영특하고 예쁜지, 카야와 테이트가 주고받은 깃털이 어떤 새의 것이었는지, 고아처럼 살던 카야가 생물학자로 성공해서 책을 몇 권이나 냈는지,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나약한 사람이었는지, 체이스는 또 얼마나 나쁜 녀석이었는지, 엄마가 왜 집을 나갔고, 믿었던 테이트는 왜 떠났고 왜 다시 돌아왔는지에 대해선 말해도 이 부분에 대해선 조상님의 이름을 걸고라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 나는 원래 책이나 영화의 스포일러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내용말고도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들이 많으므로) 이 영화만큼은 반전을 지켜주고 싶다. 팽팽하진 않아도 일정한 힘으로 궁금증을 유지시키는 이 줄을 미리 끊어낸다면 꽤 많은 것들이 빛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 관한 _ Where the Crawdads Sing


책이나 영화의 제목을 보면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책과 영화가 동일하게 사용한 이 제목은 많은 궁금증을 유발했다. 우선 crawdad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그게 가재라는 걸 알고 나면 노래를 하지 못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란 어디일까?까지 생각이 길어진다. 뭔가 기발한 메타포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나마 책에서는  '덤불숲 멀리, 생물들이 생물처럼 살아가는 곳'이란 테이트의 설명이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더 모호하다. 늘 곁에 있을 거라 믿었던 막내 오빠마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면서 어린 카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다.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기면 엄마가 말했던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가. 그러면서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혹시 비밀 장소인 책 읽는 작은 오두막이 그곳일지 모른단 생각을 했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서는 그곳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카야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채 여섯 살부터 습지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녀를 보호하고 가르치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건 자연이다. 카야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고 믿는다. 영화의 막바지, 어느새 흰머리칼의 노인이 된 카야는 어릴 때 집을 나간 엄마가 돌아오는 환영을 보고 웃으며 습지의 작은 배 위에서 홀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순간 나는, 어쩌면 카야는 비로소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다다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카야의 삶으로 끌어오면 이내 두 사람이 떠오른다. 습지 근처에서 작은 잡화상을 하는 흑인 부부, 점핑과 메이블이다. 마을에서 카야를 만나면 친절하게 대해주고 나중에 카야의 변호사가 된 밀턴도 있고, 그녀를 사랑한 테이트도 있었지만, 세상의 약자이면서도 어린 카야의 생계를 돕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살펴 주며 사랑한 유일한 어른들이다. 카야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따뜻한 관심으로 외롭지 않게' 해주는 곳을 의미한다면 바로 점핑과 메이블이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사실 crowdad sing 이란 말은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흑인을 차별하는 단어로 쓰였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2009년에 발표된 Kathryn Stockett의 The help라는 책에서 흑인을 나타내는 말로 썼는데 다시 델리아 오웬스가 이 단어를 사용해서 인종적 고정관념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책이나 영화 어디에도 그런 뉘앙스를 주는 곳은 없는 데다 점핑과 메이블이 카야에게 고맙고 중요한 사람이긴 해도 제목으로 사용될 만큼 큰 비중은 아니었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추측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일지라도 인종 차별과 관련이 있으면 예민한 사안이라 굳이 연결시키지 않으려다 점핑과 메이블이 고마워서 그냥 썼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영화나 책을 보는 게 꽤 힘들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삶은 때때로 단 한 사람의 작은 도움이나 이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반딧불이의 생태에 대한 카야의 시, 이 시 속에 비밀이 숨어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가명으로 많은 시를 발표한 시인이기도 한데 몇 개의 시는 살인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은유를 품고 있다.) 큰 비밀을 끌어안은 습지는 여전히 조용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나도 모르게 은근히 세뇌되었던 '인간이 만든 선악의 기준은 자연에서는 무효하다'라는 말의 마취가 풀리면 잊고 있었던 제도와 도덕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지고 잠깐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아주 빼어나진 않지만 볼만한 영화다. 운 좋게 아직 책을 읽지 않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사소한 끌림_ 카야의 작업실


사실 습지의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욱 마음을 끌었던 장면은 바로 카야의 침실 겸 작업실이었습니다, 카야는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난 후 홀로 남았을 때 어둠이 주는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포치로 매트리스를 끌고 와서 잡니다. 기역 자로 된 유리벽으로 달빛이 내려오는 마당과 습지가 보이고 아마 풀벌레 소리도 들렸겠지요. 이후로 카야는 이곳에서 계속 생활하는데 그녀가 습지 식물과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그린 정밀화들이 가득 붙어있는 그 방이 너무 예뻤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도감 같은데나 쓰일 식물이나 어패류의 정밀화를 보면 마냥 기분이 좋아지고 저도 그려보고 싶어지거든요.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그림도구들을 꺼내서 그려봤는데 원래도 평범한 수준인데다 너무 오래 그리지 않아서 엉망이더라고요. 대신 십년쯤 전에 그렸던 그림들, 많이 망설이다 다시 올리면서, 이젠 자유로운 시간들이 많으니 꾸준하게 그려보려고 해요. 그림이 좀 늘었다 싶으면 보여드릴게요. :)


아주 오래전에 그렸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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