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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19. 2024

수로왕릉의 뒷길

여행의 정점 같은 순간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바로 앞이 탁 트인다. 반듯한 광장 가득 햇살이 쏟아진다. 주변의 환경에 의해서긴 하겠지만 가끔은 햇살도 시끄러울 때가 있는데 고요하기 그지없다. 익숙하지 않은 습한 더위만 아니라면 저 푸른 하늘과 이토록 넘치는 햇살만으로도 여행의 감흥은 충분했을 것이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오래된 시 한 구절,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그래, 그리워하지 뭐. 그리움 따윈 금세 더위에 지쳐 달아날 테니까.



보색에 가까운 하늘과 단청의 대비는 모든 것을 더욱 선명하고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햇살이 뜨거운 만큼 풍경은 돋보이지만 양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가방에서 썬그래스를 꺼내다가 문득, 먼 옛날 새댁일 때 썼던 흰색에 가까운 연한 하늘색 레이스 양산이 떠올랐다. 마치 지금 집으로 되돌아가면 신발을 신느라 내려놓았다가 깜빡 잊고 나온 그 양산이 현관에 그대로 놓여있을 것 같다. 환각처럼 기억이 뒤섞이는 건 햇볕 때문일까? 이곳은 어디선가 멈춘, 잃은, 혹은 잊은 시간 같다.


기와의 처마 끝을 스치고 흙바닥으로 떨어진 햇살은주변을 더욱 고즈넉하게 만든다. 만약 다른 장소였다면 더위를 불평하거나 빨리 떠나고 싶었을 텐데 더위마저 색다른 체험 같다. 낯설다는 건 습관적인 호불호를 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지난 몇 달은 마치 익숙함과 결별하는 시간같았다. 아무것도 나를 먼저 떠나진 않았으니 내 선택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정을 했다고 해서 원인과 과정을 인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낯설어진 건 나 자신이란 걸 알아채고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낯선 도시에 있지만 어쩌면 그 어느때보다도 누군가가 필요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수로왕릉은 사적 제73호,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모신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부르는 높이 5m의 원형 봉토 무덤이다. 비문에는 '가락국수로왕릉'이라 적혀있다. 주변의 18,000여 평이 왕릉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 안향각, 전사청, 납릉정문과 제기고 등의 부속건물과 신도비, 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로 왕위에 올라 서기 48년 인도의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으며 김해 씨의 시조이다.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춘추 대제를 지내는데 제례행사가 독특해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 밖에서 바라보는 수로왕릉, 안으로 들어설 수는 없지만 대신 담장이 낮아서 이렇게나마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둥근 형태가 주는 안온함의 최상급에 속할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웅장하겠지만 오히려 거리감이 있어서 크기에 압도당하지 않고, 능 전체에 기품이 흘러 좋았다.



오래된 고요가 낮게 엎드려 있었다. 안온하다는 느낌이 내내 따라온다. 이곳의 기류에는 미세한 위로의 입자가 숨어있다.



들어올땐 못 봤는데 다른 방향으로 나가다가 만난 입구 쪽에 있는 배롱나무 한 그루, 배롱나무를 좋아해선지 반가웠다. 수형이 아담하고 다정하다. 그리고 옆에는 긴 흙담이 있는데, 이 담을 타고 능소화가 흐드러진 유월이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포토존이라고 한다. 이제 꽃은 몇 송이 남지 않았다.


사실 햇살이 너무 쨍해서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그래도 능 주변은 다 둘러본 것 같아서 나가려다 왼쪽 멀리 별채 같은 노란 벽의 건물들을 보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갔더니 매년 제례를 지낼 때 쓰는 제기나 음식물들을 보관하는 부족 건물이었다. 더운데 그냥 나갈걸 그랬다고 후회를 하는 순간, -왜 있잖은가.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끌어당기는 기분, 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리고 유심히 보게 되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낡은 솟을대문이 보였다.



흔한 표현으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낡고 운치 있는, 활짝 열려있는 문 너머의 나무 그늘을 보자 걸음이 빨라졌다. 마치 서두르지 않으면 사라질 풍경이라도 되는 듯 아주 짧은 거리였는데도 마음이 앞서갔다. 편하게 앉아서 쉴만한 그늘이 간절하던 참이었다.



단지, 나무 그늘이면 족했는데 풍경은 첫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보랏빛 맥문동이 과묵한 초록의 표정을 바꾼다. 맥문동이 이토록 그윽한 꽃이었나? 문을 하나 통과했을 뿐인데 마치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한 것처럼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시원해지고, 나무 그림자 어린 흙길은 너무나,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마음도 이내 풍경을 닮아간다. 고요하다. 그리고,



수로왕릉의 새로운 발견, 우아하고 아름답다. 뒷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풍경 앞에서 잠시 멈춘다. 마치 사랑 많았던 수로왕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나직하게 제자리를 찾아 머물러, 더는 아무런 동요나 바람도 없을 것 같은 풍경 앞에서 나는 문득, 쓸쓸하다. 어쩌면 아름다움과 쓸쓸함은 동의어일지 모른다.



좀 오래 머물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디딤돌처럼 동그랗게 놓여있는 나무의자가 편했다. 아마 누군가 여기쯤에 쉴 곳을 만들자고 한 사람도 지금 내가 보고 감탄하는 풍경을 사랑했을 것이다. 백팩을 내려놓고 앉아서 물을 조금 마시고 커피 사탕을 한 알 입에 넣고 자질구레한 생각의 끈도 풀고 오래도록 풍경을 바라본다. '숨'이 '쉼'이 되는 순간이다. 언젠가 오늘을 떠올린다면 가장 먼저 이 순간이 그리울 것이다. 여행이 굳이 멋진 건물이나 경치를 보고 특별한 음식을 먹고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모든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것들의 구석에서 나 홀로 만난 한 순간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때, 여행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맥문동 잔꽃잎마다 다정하게 스미던 햇살이, 나무 그림자를 딛고 걸어가 닿은, 우아한 왕릉의 뒷모습에 나는 감탄한다. 오늘 여행의 정점같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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