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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17. 2024

생애 첫 밀면

물밀면과 왕만두



혼자 여행을 할 때, 편하면서도 때론 불편한 일 중에 하나가 음식이다. 동행의 입맛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대충 한 끼를 때우거나 배가 고파도 귀찮으면 안 먹어도 되는 자유가 있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몸은 그동안의 내 식습관을 기억하고, 새로운 장소에서 기대하는 음식들도 계속 생각나게 만든다.


조금 긴 일정이라 여행 전에 바랐던 건, 숙소 근처에 차려주는 대로 먹는 깔끔한 백반집이나 샌드위치와 커피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작은 카페가 있어서 하루에 한 끼는 고민 없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아니, 적극적으로 찾아본 것도 아니고 늘 같은 길로 다니니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편이 맞겠다.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꽤 많은 식당들을 볼 수 있지만 음식의 종류나 식당의 규모를 따지다 보니 마땅치가 않았다. 어쩌면 혼자 식당에 가는 게 싫어서 괜히 까탈을 부리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김해에 온 지 거의 일주일째라 소문난 음식 한 가지 정도는 먹어줘야 여행의 구색이 맞을 것 같아서 '오늘은 꼭'이라고 아침부터 다짐을 한다.


일단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을 검색하다가 '자갈치 생선구이'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잘 구운 생선에 평범하지만 맛깔스러운 반찬 서너 가지가 놓인 식탁이 그리웠다. 동네의 새로운 길을 걸어서 식당을 찾아갔다. 아.. 그런데.. 매주 화요일은 정기 휴일이라네. 실망이 허기로 변했는지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잠깐 망설이다가 걸어오는 길에 보았던 '밀면'집으로 향했다.



이가네 가야밀면은 문 닫은 생선구이집에서 오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꽤 알려진 곳이기도 하고, 나는 아직 밀면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김해에서 가볼 곳의 목록에 있던 식당인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지는 몰랐다, 더구나 길 건너편에서 우연히 간판을 보았으니 오늘은 밀면을 먹어야 하는 날인가 싶다. 두 개의 간판 사이에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걸 보니 장사가 잘 되어서 증축을 한 것 같다. 밀면에 대한 내 상식은 부산의 음식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난생처음 먹는 음식인데 대충의 내력(?) 정도는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한다.(다 먹고 숙소에 돌아와서)


밀면은 부산의 향토 음식 중 하나로 만드는 방식이나 보기에는 평양, 함흥냉면과 비슷하지만 메밀가루대신 밀가루와 녹말가루(고구마, 감자녹말)를 혼합에서 만든 반죽으로 조금 굵게 면을 뽑고, 약초, 채소 등을 넣어 우려낸 돼지 육수를 사용하는 다른 종류의 냉면이다. 돼지의 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귀, 감초등의 약재를 쓴다. 메밀가루로 만드는 냉면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서 한국 전쟁 이후 서민들의 배고픔을 덜어주는 음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타지인들도 많이 찾는 소문난 향토음식이 되었다.



늘 손님이 많은 곳이라고 했는데 워낙 넓은 데다 좀 이른 점심시간이라선지 붐비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 장의 사진을 합한 공간이 전체 면적의 1/4쯤 되려나? 무척 넓었는데 안쪽의 약간 구석진 자리가 눈에 띄었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해도 미안하지 않고 음식 사진을 찍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자리 같아서 얼른 앉았다.(식당 내부와 음식 사진 찍는 걸 왜 이리 못하겠는지.. 훔쳐보듯 후다닥 찍는다.) 메뉴가 단순해선지 음식도 빨리 나왔다. 나는 국수 종류는 국물이 있는 것보다 비빔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비빔밀면'의 유혹을 물리치고 '물밀면'을 시켰다. 그래도 국물을 먹어봐야 제대로 밀면을 먹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리고 인터넷 후기에서 극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왕만두도 시켰다.



물밀면의 국물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한약재 향이 났다. 냄새가 아니고 향이었다. 맛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약재향이 국물을 삼키고 나면 콧속에서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약재 향이 나는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거슬리진 않았다. 면은 내가 딱 좋아하는 굵기와 끈기였다. 여름에 더위에 지쳤을 때, 밀면 한 젓가락을 후루룩 먹고 국물을 한껏 시원하게 들이켜면 음식을 먹는 동안만이라도 몸에 새로운 기운이 돌 것 같은 맛이었다. (한약재 향 때문에 그랬을까? ㅎ)



밀면 위엔 약간 도톰한 편육 한 조각이 올려져 있는데 보기보다 맛있어서 젓가락으로 조금씩 찢어가며 아껴 먹었다. 좋아하는 무절임도 넉넉하게 들어 있어서 더 시원한 맛을 느끼게 했다. 며칠 동안 그야말로 대충 먹고 지냈던 터라 아주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하지만 국물은 좀 남겼다. 먹어보면서 조절할 것을 그냥 올려져 있던 양념장을 다 풀었더니 나중엔 조금 텁텁했고 콧속에서만 맴돌던 연한 약재향이 국물을 마실수록 점점 더 '향'이 아닌 '맛'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딱 내 취향의 면발이다. 끈기가 좀 모자라서 선호하지 않는 소면과 질겨서 가위로 잘라먹게 되는 냉면의 중간이었다.


만두는 이름값을 제대로 할만큼 큰, 정말 왕만두였다. 밀면을 먹었으니 하나만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욕심 내서 두 개째를 갈라서 간신히 먹고 나머지는 포장을 했다. 어떤 이들은 밀면보다 만두가 더 맛있다고 했는데 아주 짜지만 않으면 음식의 맛보다도 식감에 예민한 내겐 씹히는 게 거의 없는 부드러운 만두소가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잡내도 없고 속이 꽉 차서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만든 손만두를 먹었다. 만두는 좋아하며서도 집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만들까 말까 한 음식이라 먹고 싶을 땐 냉동된 시판제품을 샀기 때문에 오랜만에 흡족한 마음으로 먹었다

가격은 물밀면 6,500원, 비빔밀면 7,000원, 왕만두 7,000원이다. 1년 전  가격이라 아무래도 올랐을 것 같아 찾아보니 역시, 작년에 각각 1,000원씩 올랐다. 그래도 요즘 같은 '물가가 미쳤어요' 시대에는 싸다는 생각이 든다. 밴쿠버에서 이 가격에 먹을 수만 있다면 주식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품고 숙소로 돌아와 포장해 온 만두를 냉장고에 넣으니 마치 구황작물을 쟁여놓듯 뿌듯하다. 그런데 몇 시간 지나자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갑자기 밀면 생각이 났다. 이 정도면 언제 다시 또 가야지 뭐. 다음엔 '비빔밀면'을 먹어봐야겠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주일쯤 후에 다시 가서 먹은 '비빔 밀면', 평범한 비빔국수와 다른 점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양념장이 너무 많고 강했다. 미리 얘기하면 양념장을 따로 주신다는 것도 몰랐고, 물밀면을 먹을때도 양념이 좀 많은 듯 해서 다음엔 미리 덜어내려고 했는데 깜빡 잊은 탓이다. 그래도 육수 덕을 보았다. 셀프로 양껏 가져다 마실 수 있는 따뜻한 육수가 있는데 지난번엔 거의 마시지 않았었다. 원래 냉면을 먹을 때 따뜻한 면수나 육수를 즐기는 편이 아닌데다 물밀면엔 자체 육수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엔 육수가 비빔밀면의 강한 양념맛을 중화시켜 주어서 한 컵을 더 가져다 마셨다. 속이 편해지는 뭉근한 맛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 내내 양념맛이 올라와서 조금 불편하긴 했다. 평소에 국수는 국물에 빠진 것보다는 비빔을 좋아하는데 밀면은 물밀면이 더 입에 맞았다. 이제 곧 밀면을 먹을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갈텐데 자주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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