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이는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 남자아이였다. 17년 전 선천성 간 질환으로 이식 수술을 받았다. 외래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오던 와중에 최근 간 기능의 이상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잘 쓰던 간이 수명을 다한 것이었다. 재환이의 성장기를 함께했던 간이 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입원 당시부터 복수가 차고 다리가 붓고, 황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간 기능을 도와주는 보존적인 약을 썼지만 호전은 없었다. 새로운 간으로 교체해 주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암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재환이는 항상 차분했다. 아프다는 내색조차 잘하지 않았다. 그 흔한 '이상하다, 불편하다'라는 말 대신 '괜찮아요'라는 말을 더욱 많이 한 친구였다. 오죽하면 회진 돌면서 "아프면 말 좀 해~!"라고 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재환이와 반대로 피검사 수치는 갈수록 나빠졌다.
입원 후 1주일, 결국 사달이 났다. 간 기능이 더욱 나빠지면서 암모니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급성 간성뇌증으로 재환이는 이성을 잃었다. 입원 기간 내내 차분했던 재환이가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욕을 했다.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사지억제대가 뜯어나갈 정도로 간성뇌증 증상이 심했다. 그 길로 재환이는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투석이 필요했다.
MELD 수치는 뇌사자의 장기가 생겼을 때 간이식 환자들의 우선순위를 선정할 때 쓰는 계산법이다. Model for end stage liver disease의 줄임말이다. 의미하는 바처럼 MELD 수치가 높을수록 end stage liver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다. MELD 수치의 만점은 40점. 간 기능과 함께 신기능도 망가진 재환이는 MELD 37점이었다. 재이식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점수였다. 재환이의 혈액형과 적합한 뇌사자가 생기기만 하면 간을 받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전까지 재환이가 잘 버텨줄 수 있을지였다.
다행히 재환이는 일주일 만에 다시 병동으로 올라왔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호전되었다는 증거였다. 간성 뇌증이 호전되고 예전에 알던 재환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궁극적인 치료는 간 이식이었다. 적합한 뇌사자가 생기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순 없었다. 재환이의 아버지는 생체 간 이식을 위해 검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재환이 아버지는 예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다고 한다. 어릴 때 받은 재환이의 이식 간이 언제든 나빠질 수 있고, 재이식이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언제 올지 모르는 간 기증 수술에 대비해 술을 드시지 않고 운동도 하며 꾸준히 관리하셨다. 그 시기가 지금이었다.
재환이네 부자의 생체이식 날짜가 잡히고 한주 전 마지막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요즘 많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간 기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끈끈하다는 모자관계에서도 간 기증 결정은 어렵다. 내 간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떼어주는 결정은 숭고한 만큼 위험하다. 기증해 준 사람의 남은 간이 망가지거나 담도나 혈관이 좁아진다면 오랜 기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다. 기증 전 검사가 까다롭고 많은 이유는 기증자 본인을 위해서도 있는 셈이다.
생체 간 이식이 3일 정도 남은 시점. 희소식이 찾아왔다. 재환이와 혈액형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생긴 것이다. 뇌사자의 최종 간 검사 후 이식이 확정될 때까지 말을 아꼈다. 재환이네에게 괜한 기대감과 실망감을 안겨줄 순 없었다. 회진을 돌 때마다 좋은 소식을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에 입이 간질거렸다. 수술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뇌사자의 간이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바로 그날 밤 10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신기하게도 재환이는 전날 밤 뇌사자가 생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객관적이 근거가 중요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간절함과 그 느낌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재환이의 두 번째 간이식 수술을 준비하면 이전 기록을 열어보았다. 17년 전에도 본원에서 간 이식을 받았던 터라 비교적 기록을 찾아보기는 쉬웠다. 또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당시 수술기록 작성자가 지금의 교수님이었다는 사실이다. 교수님이 이식을 수련하던 시절, 지금의 내 위치에서 1st assistant를 했던 소아 간이식 수술이 재환이의 첫 번째 간 이식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집도의로, 성인이 되어버린 재환이의 두 번째 간이식 수술을 하게 되신 것이다. 교수님은 결자해지 하겠다며 수술방에 오셨다.
개발자인 재환이는 '서치(Search)'에 능했다. 교수님이 간 수술에서는 대한민국 첫 번째라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었다. 수술방에 가기 전 수술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재환이가 새삼 대단했다. 그렇게 큰 수술을 받으면서도 수술이 잘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교수님을 만난 인연도 복이었다. 재환이의 믿음대로 수술은 잘 끝났다. 늦게 시작한 탓에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배를 닫고 나왔지만 재이식인 걸 감안하더라도 큰 위험 없이 수술은 잘 끝났다. 이제 회복만 남았다. 그리고 이번 수술기록은 내가 쓰고 나왔다.
인생에서 시련은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재환이에게는 그 시련이 일찍 왔었을 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본인의 간을 더는 쓸 수 없게 된 사실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매일 같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며 일반인들과 다르게 살아온 재환이의 인생을 온전히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감기에 더 불안해했고, 맘 편히 해외여행을 다니지도, 대학생 시절 술 한 모금 마시지 못했을 성장기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재수술을 받기 전에도, 받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잔잔히 미소 짓는 재환이의 모습에서 어쩌면 시련이 없어야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 안겨준 시련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기도 하는 법이다. 마지막까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퇴원하는 재환이는 인생을 극복의 역사로 만들어 나가는 산 증인이었다.
재환이는 거의 5주를 병원에 있었다. 안 좋았던 간 기능, 신기능은 모두 정상인만큼 회복했다. 수술 전 노랗게 뜨던 환자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17년 뒤 선생님이 이제 교수님 위치에서 수술을 하실 수도 있겠네요.'라는 퇴원 전날 재환이 어머니의 말씀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17년 뒤에 어떤 의사로 살아가고 있을지 곱씹어본 퇴근길이자, 간만의 업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