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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외과의사 Jul 14. 2024

재환이의 두 번째 간이식


재환이는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 남자아이였다. 17년 전 선천성 간 질환으로 이식 수술을 받았다. 외래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오던 와중에 최근 간 기능의 이상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잘 쓰던 간이 수명을 다한 것이었다. 재환이의 성장기를 함께했던 간이 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입원 당시부터 복수가 차고 다리가 붓고, 황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간 기능을 도와주는 보존적인 약을 썼지만 호전은 없었다. 새로운 간으로 교체해 주는 것 외 방법이 없었다. 암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재환이는 항상 차분했다. 아프다는 내색조차 잘하지 않았다. 그 흔한 '이상하다, 불편하다'라는 말 대신 '괜찮아요'라는 말을 더욱 많이 한 친구였다. 오죽하면 회진 돌면서 "아프면 말 좀 해~!"라고 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재환이와 반대로 피검사 수치는 갈수록 나빠졌다.


입원 후 1주일, 결국 사달이 났다. 간 기능이 더욱 나빠지면서 암모니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급성 간성뇌증으로 재환이는 이성을 잃었다. 입원 기간 내내 차분했던 재환이가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욕을 했다.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사지억제대가 뜯어나갈 정도로 간성뇌증 증상이 심했다. 그 길로 재환이는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투석이 필요했다.


MELD 수치는 뇌사자의 장기가 생겼을 때 간이식 환자들의 우선순위를 선정할 때 쓰는 계산법이다. Model for end stage liver disease의 줄임말이다. 의미하는 바처럼 MELD 수치가 높을수록 end stage liver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다. MELD 수치의 만점은 40점. 간 기능과 함께 신기능도 망가진 재환이는 MELD 37점이었다. 재이식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점수였다. 재환이의 혈액형과 적합한 뇌사자가 생기기만 하면 간을 받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전까지 재환이가 잘 버텨줄 수 있을지였다.


다행히 재환이는 일주일 만에 다시 병동으로 올라왔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호전되었다는 증거였다. 간성 뇌증이 호전되고 예전에 알던 재환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궁극적인 치료는 간 이식이었다. 적합한 뇌사자가 생기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순 없었다. 재환이의 아버지는 생체 간 이식을 위해 검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재환이 아버지는 예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다고 한다. 어릴 때 받은 재환이의 이식 간이 언제든 나빠질 수 있고, 재이식이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언제 올지 모르는 간 기증 수술에 대비해 술을 드시지 않고 운동도 하며 꾸준히 관리하셨다. 그 시기가 지금이었다.


재환이네 부자의 생체이식 날짜가 잡히고 한주 전 마지막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요즘 많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간 기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끈끈하다는 모자관계에서도 간 기증 결정은 어렵다. 내 간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떼어주는 결정은 숭고한 만큼 위험하다. 기증해 준 사람의 남은 간이 망가지거나 담도나 혈관이 좁아진다면 오랜 기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다. 기증 전 검사가 까다롭고 많은 이유는 기증자 본인을 위해서도 있는 셈이다.


생체 간 이식이 3일 정도 남은 시점. 희소식이 찾아왔다. 재환이와 혈액형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생긴 것이다. 뇌사자의 최종 간 검사 후 이식이 확정될 때까지 말을 아꼈다. 재환이네에게 괜한 기대감과 실망감을 안겨줄 순 없었다. 회진을 돌 때마다 좋은 소식을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에 입이 간질거렸다. 수술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뇌사자의 간이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바로 그날 밤 10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신기하게도 재환이는 전날 밤 뇌사자가 생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객관적이 근거가 중요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간절함과 그 느낌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재환이의 두 번째 간이식 수술을 준비하면 이전 기록을 열어보았다. 17년 전에도 본원에서 간 이식을 받았던 터라 비교적 기록을 찾아보기는 쉬웠다. 또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당시 수술기록 작성자가 지금의 교수님이었다는 사실이다. 교수님이 이식을 수련하던 시절, 지금의 내 위치에서 1st assistant를 했던 소아 간이식 수술이 재환이의 첫 번째 간 이식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집도의로, 성인이 되어버린 재환이의 두 번째 간이식 수술을 하게 되신 것이다. 교수님은 결자해지 하겠다며 수술방에 오셨다.


개발자인 재환이는 '서치(Search)'에 능했다. 교수님이 간 수술에서는 대한민국 첫 번째라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었다. 수술방에 가기 전 수술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재환이가 새삼 대단했다. 그렇게 큰 수술을 받으면서도 수술이 잘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교수님을 만난 인연도 복이었다. 재환이의 믿음대로 수술은 잘 끝났다. 늦게 시작한 탓에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배를 닫고 나왔지만 재이식인 걸 감안하더라도 큰 위험 없이 수술은 잘 끝났다. 이제 회복만 남았다. 그리고 이번 수술기록은 내가 쓰고 나왔다.




인생에서 시련은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재환이에게는 그 시련이 일찍 왔었을 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본인의 간을 더는 쓸 수 없게 된 사실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매일 같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며 일반인들과 다르게 살아온 재환이의 인생을 온전히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감기에 더 불안해했고, 맘 편히 해외여행을 다니지도, 대학생 시절 술 한 모금 마시지 못했을 성장기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재수술을 받기 전에도, 받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잔잔히 미소 짓는 재환이의 모습에서 어쩌면 시련이 없어야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 안겨준 시련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기도 하는 법이다. 마지막까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퇴원하는 재환이는 인생을 극복의 역사로 만들어 나가는 산 증인이었다.


재환이는 거의 5주를 병원에 있었다. 안 좋았던 간 기능, 신기능은 모두 정상인만큼 회복했다. 수술 전 노랗게 뜨던 환자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17년 뒤 선생님이 이제 교수님 위치에서 수술을 하실 수도 있겠네요.'라는 퇴원 전날 재환이 어머니의 말씀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17년 뒤에 어떤 의사로 살아가고 있을지 곱씹어본 퇴근길이자, 간만의 업로드.



(등장인물의 이름과 일부 시간 순서는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각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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