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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레벌레 Jul 31. 2023

[작문] 2023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읽고


남자는 늦은 오전 일어나 찬장에 있는 햇반을 하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냉장고에서 엄마가 해놓으신 김치랑 장조림 등을 대충 척척 꺼내놓고 잠시 기다리면 삐-삐- 소리가 난다. 뜨거운 김이 나는 햇반을 꺼내 들어 식탁에 툭 던지고 앞에 앉는다. 한 손에는 핸드폰, 다른 손에는 젓가락을 든다. 유튜브를 킨다. 엄지로 스크롤을 쓱쓱 내리면서 흰 밥과 반찬을 적당히 입에 쑤셔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남자의 엄지가 문득 멈춰 선다. 화면에 스케치 코미디 속 한 장면이 쇼츠로 흘러나오고 있다. “아니 XX 경력직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경력을 어디서 쌓냐?” 피식 웃다가 문득 며칠 전 본 캥거루족과 청년 실업에 관한 사설이 떠오르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청년들이 살아야 나라 경제가 살고 미래가 생기는 건데, 윗 대가리엔 지 뱃속 기름칠하기 급급한 멍청하고 이기적인 인간들만 한가득이니 얼마나 개탄스러운가!



명문 대학만 나와도 취업이 되는 시절이 있었단다. 남자는 그랬던 시절에 교육열이 넘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환경이 그러하니, 기억도 안 날만큼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온갖 학원을 다니고,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하고, 영재교육원이니 모의국회니 생기부를 채워 넣어줄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누구네 아들은 S대학에 입학해서 과외로 한 달에 몇 백씩 용돈을 번대” “Y대에 간 누구 딸이 교류전에서 K대 남친을 만났단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SKY를 외쳐댔다. SKY. 준말도 하늘이라니. 너무나도 멋졌다. 남자의 청소년기는 대학에 대한 한 아름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렇게 열아홉 평생을 명문대 하나 바라보고 살았던 남자는 결국 꿈에 그리던 Y대 합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현재. 남자는 졸업을 위해 남은 학점을 모두 채웠지만 졸업을 하지는 않았다. 뭐 주변에는 낭만을 좀 더 즐기고 싶다거나, 학생 신분으로서의 혜택을 좀 더 누리고 싶다는 등의 적당한 변명거리를 둘러대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졸업을 하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을 '명문대학생'으로 소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 그 말 말고는 스스로를 소개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이다. 어릴 때 듣던 말과는 다르게 남자는 취업이 잘 안 되었다. 명문대 졸업장 한 장이면 못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사회에 들어서려고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남자는 이렇다 할 손 끝 기술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자연스레 남자를 찾는 곳도 별로 없었다. 취업정보 사이트에 학력이 거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이력서를 올려놓으니 들어본 적 없는 기업이 기계로 쓴 것 같은 제안을 왕왕 보내오기는 했다. 다만 남자의 눈에는 연봉이나, 복지나, 업무나 도저히 맘에 드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문학을, 또 순수 학문을 공부한 청년 인텔리들이 빛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학문이 발전을 하고 나라가 발전을 할 텐데. 기득권만 챙기고 기술자, 전문직만 양성해 대니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다, 고 남자는 생각했다. 문득 학창 시절 국어학원에서 분석본으로 읽고 외웠던 소설 한 편이 떠올랐다. 레디메이드 인생. 잘 만들어 놓고도 팔리지 않는, 임자 없는 기성품 인생을 의미한댔지. 참 웃픈 옛날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시대란 돌고 도는구나. 아직도 잘 기억하는 걸 보니 내 머리도 죽지 않았네. 다소 뿌듯함을 느끼며 다시금 엄지로는 스크롤을 쓱쓱 내리고 반대 손으로는 입에 음식을 쑤셔 넣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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