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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내게 건넨 마지막 선물

제주에서 만난 백록이야기[김산작가]

by 두유진

제주에서의 여름은 유난히 빠르게 흘렀다. 섬의 공기는 바다 소금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바람의 결이 섞여 있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시야 가득 들어오는 감귤밭과 한라산의 능선이 번갈아 나타났다. 바다의 푸른빛과 초록의 들판, 검은 돌담이 만드는 풍경 속에서 나는 어느새 도시의 속도를 잊고 있었다.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전 면세점에 들렀다. 여행이 끝나가는 순간마다 사람은 조금의 아쉬움과 기념을 남기고 싶어 한다. 나는 보통 화장품 코너, 주류 코너, 기념품 매대를 천천히 지나치다가, 결국은 와인 한 병을 들곤 한다. 여독을 풀 와인을 찾아본다. 와인을 담아주던 계산대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림이었다. 그림이 있는 쇼핑백에 눈이 멈췄다.


쇼핑백 표지에 그려진 것은 깊고 푸른 숲이었다. 화면 아래쪽,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길목에 하얀 사슴이 서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낯설고도 묘하게 익숙했다. “이건 그냥 디자인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속 공기는 실제로 코끝에 닿는 듯했고, 나뭇잎 사이사이에 번지는 빛과 그림자는 한 폭의 회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쇼핑백 한쪽에 작게 적힌 이름, ‘김산’. 낯선 이름이었다. 궁금해져 검색을 시작했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 작가였고, 제주대학교 미술학부에서 학·석사를 마쳤으며, 2018년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의 ‘제주청년작가’로 선정된 이력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곶자왈, 백록, 그리고 제주 신화 속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고 했다. 그 순간, 쇼핑백 속 그림의 사슴이 단순한 사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제주의 숲과 전설 속에서 살아온 ‘백록(白鹿)’이었다.

본향(本鄕) mixed media on canvas 60.6 x 72.7cm 2025

김산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금 더 읽다 보니, 그의 작업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시간을 잇는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숲은 그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명의 원형(archetype)이었고, 백록은 그 숲의 영혼이자 안내자였다. 작품 해설 속 문장 하나가 오래 머물렀다. “숲의 빛은 인간이 잊고 지낸 마음의 결을 되살린다.”


생각해 보니,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도 숲이었다. 한라산 자락의 곶자왈에 들어섰을 때, 공기는 다른 세상처럼 변했다. 나뭇잎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이끼 위로 스며드는 소리, 그 위로 얹히는 새들의 울음, 그리고 멀리서 스치는 바람의 냄새. 모든 감각이 열리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숲길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만든 빛의 결이, 마치 오래된 책갈피 속에서 발견한 잊힌 문장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마지막 날 면세점에서 본 김산 작가의 숲 속 백록과 겹쳐졌다.


백록은 그저 우연히 만나는 존재가 아니라, 준비된 자만이 만날 수 있는 상징이라고 했다. 내게 그 그림 속 백록은 ‘잘 왔다’고 말하는 듯했다. 낯선 여행자가 아니라, 이 숲의 한 조각이 되어도 괜찮다고. 그 눈빛 속에는 부드러운 환영과 동시에 묵묵한 질문이 있었다. “당신은 돌아가서도 이 숲을 기억하겠는가?”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가오자 면세품을 담아 쇼핑백을 꼭 쥐었다. 단순한 종이 가방일 뿐인데, 나는 그것을 함부로 접거나 구기고 싶지 않았다. 제주에서의 시간, 곶자왈의 숨결, 그리고 김산 작가의 숲이 고스란히 그 표지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천천히 흘렀다. 그 속에서 나는 이번 여행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일상 속에서 너무 당연하게 흘려보내던 공기, 빛, 그리고 침묵이 사실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숲과 백록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후, 쇼핑백은 방 한쪽에 세워두었다. 매일 아침 그 그림을 스치듯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쇼핑백 속 숲을 오래 바라본다. 그러면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면세점의 그 순간과 숲 속의 백록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 그 눈빛이 건네던 말이 마음속에서 또렷하게 울린다. “괜찮아, 너는 다시 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제주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또 하나의 안식처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김산 작가의 작품은 그 길의 표식을 남겨주었다. 언젠가 다시 그 숲을 찾아가, 백록을 만나고,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그 빛을 가슴에 새길 날을 기다리면서 나는 오늘도 그 그림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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