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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인가, 본성의 언어인가

마크 레이너의 예술 앞에서

by 두유진

오늘, 나는 우연히 마주친 한 장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가락동 롯데마트 2층, 다양한 작가들의 그림이 보였다. 어느 갤러리 한쪽벽에 전혀 다른 리듬이 흐르고 있었다. 그 리듬은 낙서처럼 보였고, 동시에 그 어떤 이성적 설명도 비켜가는 감각이었다.

‘낙서그림’이라고 불러야 할까?

한눈에 보면 그렇게 보였다. 질서도, 정돈도, ‘잘 그린’ 기법도 아닌,

마치 아이가 벽에 그린 듯한, 혹은 꿈에서 본 심상들을 급하게 토해낸 듯한 이미지들.

그 안에 무언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있었다.

그림 속에서 나는, 미처 표현하지 못하고 삼켜온 무의식의 조각들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 작품들의 작가는 마크 레이너(Marc Rayner).

호주 출신으로, 현재는 유럽 특히 스웨덴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다.

그는 원시 예술, 아동의 낙서, 사회적 상징들을 뒤섞은 독특한 표현 방식을 지녔으며,

그림보다는 차라리 시각적 에너지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낙서 속에 숨은 울림


마크 레이너의 작품을 감상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건 나로선 도달할 수 없는 감각이구나’라는 일종의 경외심이었다.

그림이 아니라 감정을 붓으로 칼질하듯 도려낸 듯한 터치.

색은 튀고, 형태는 왜곡되고, 문자는 찢긴 문장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 혼란 속에는 기묘한 균형과 리듬이 숨어 있었다.


작품 앞에 서 있으니, 내 안의 어떤 언어도 이 그림을 해석할 수 없었다.

대신, 감정이 먼저 반응했다.

언어보다 빠르게, 이 그림은 내 속의 감정적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림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 안에 이런 혼돈, 있잖아.”


그 말에 나는 무너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은 종종, 논리적 설명보다 빠르게 우리 마음을 건드린다.

그저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그 그림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 낯선 감정의 울림이, 나는 참 좋았다.


사회적 질서에 저항하는 그림들


갤러리에 있는 작품 설명을 찾아보니, 더 많은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그의 그림은 단지 ‘낙서’가 아니었다.

소비주의, 정치적 불균형, 인간의 자아를 주제로 한 사회적 저항이자 현대인의 무의식을 표현한 심리적 풍경이었다.

대표작 중 하나인 「Smash and Grab Politics #2」는 정치권력의 약탈과 탐욕을 은유한 이미지로,

형광 색채 속에 분열된 자아의 그림자를 표현하고 있었다.


또한 「New Maxim」과 같은 작품은

광고 문구와 슬로건을 해체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외부의 메시지에 ‘조종당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서,

무의식 속에 눌러둔 ‘진짜 나’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다.


그러니 이 낙서 같았던 그림은, 오히려 너무 날것이라서 두렵고,

그래서 더 솔직하고, 아름다웠다.


나에게 이런 그림은 어떤 의미였나


나는 화가로서도, 교사로서도,

항상 ‘전달되는 메시지’와 ‘이해되는 구조’에 집착해 왔다.

그림이든 글이든,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마크 레이너의 그림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좋다’는 자유를 느꼈다.


감정은 원래 설명되지 않는다.

눈물이, 분노가, 혼란이, 꼭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이 그림은, 그런 감정의 허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 너 안의 그 지저분하고 무서운 것도, 결국은 너야.”


그의 그림은 말없이 그렇게 말했다.


낙서를 넘어선 대화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마크 레이너의 그림은 ‘낙서’가 아니라, ‘내면의 말’이었다.

그 말은 고요하지 않고, 질서 정연하지 않으며,

종종 너무 솔직해서 거북하고,

가끔은 아이처럼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날것 그대로의 나.


그림은 나에게 말 걸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낙서 그림 앞에서

내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표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지 깨달았다.


마크 레이너의 그림을 보고 난 후,

나는 다시 붓을 들고 싶어졌다.

잘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내 안의 혼란을, 무의식을, 날것 그대로 꺼내보고 싶어서.


낙서 같지만, 절대 낙서가 아닌 그림.

혼돈 같지만, 아주 정직한 이야기.


그림 한 장이 나에게 준 자유.

그건 설명 불가능해서 더 고마운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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