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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의미 Feb 23. 2024

나를 위한 삶

재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유튜브에서 강선주 철학자의 강의를 조금 보았다. 장자의 거목이야기를 빗대어 '인재가 된다는 것'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었다. 인재라는 말을 다시 풀어보니 섬뜩했다. 재료로 쓰일 만한 사람이다. 옛날에는 재료라고 하면 거의 다 나무였으니 그만큼 요긴하게 쓰일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강선주 철학자는 인재를 사회의 서까래가 되는 것이라 표현했다. 사람이 서까래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서까래가 지붕 구조를 지탱하며 움직여선 안되듯이, 인재라는 삶의 끝은 자신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사회를 위해 살다 죽는 것이라 했다. 사회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암묵의 룰을 따르는 것이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보면 개인적인 행복이 없고 오직 사회나 신념을 위해 사명감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삶은 숭고하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쉽게 깨진다. 그들에게 그런 삶 이외의 선택권이 주어지면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신념을 지킬 수 없다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식이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꼭 붙잡고 놓지 못하는 삶을 인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미련 없이 놓아버린다. 우리가 지금의 사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앞선 세대의 누군가들, 혹 평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를 인재들의 '영웅적인 행동과 기여' 덕분이다. 자신이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다음 사람을 위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의 덕분이다.



국가나 사회는 여차할 때면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해야 한다. 주권과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내용처럼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희생이라 불리지 않는다. 시대가 사명에 충만할 때, 개인의 희생은 강요받는다. 그리고 누구는 애국자가 되고 매국노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은 절대로 인재가 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속해있는 이상, 늘 사명을 다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 모든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명예롭게 죽었다는 편지 한 통은 전해받을 것이다.



어떤 나무가 베이게 될까. 곧게 자란 나무이다. 쓸모 있는 나무는 오래 자라지 못하고 사람들이 베어가 버린다. 나무가 제 몸을 잘라서 집을 만들고 가구를 만들고 하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으리으리한 대궐집의 멋진 서까래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나무가 과연 있을까.



스스로를 쓸모가 없고, 사회적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고 있을 때가 큰 성장으로 이어지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멋지게 불태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애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준비해 둔 그 자리는 이미 예약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레일을 벗어났다는 사람들은 탈선하여 그대로 삶을 마감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레일을 벗어나고도 멀쩡히 살아있다. 그들은 단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기차에서 내려 자기 발로 걷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미지 출처(© gillystewart,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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