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를 여자아이로 키우는 것에 대하여
둘째 아이가 1학년 때의 일이다.
코로나 이전 시대의 초등 모임은 체육관 관장님의 레크리에이션 진행에 따라 준 체육대회의 모습으로 이뤄지곤 했다.
남녀 성비가 얼추 맞는 학급이었기에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팀을 나눠 경쟁을 했는데,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이고 1학년이니 신체 능력, 운동 신경 차이가 뭐 그리 크게 나겠는가, 방심했던 내 예상과 달리 결과는 남자아이들의 압승.
그런데 결과가 이상하다.
한 영역을 빼고는 다 남자아이들이 앞섰음에도 뜬금없이 '응원 점수', '태도 점수'를 100점씩 가져가며
여학생 팀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아니, 불 타 오르는 경쟁심으로 전쟁하듯 소리치고 응원하던 저 들개 같은 사내아이들이 응원을 덜 열심히 했다고? 그것도 100대 0으로?
아니나 다를까 남자아이들이 말도 안 된다며 공을 집어던지고 발을 구르며 항의하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승리를 자축하며 기뻐하고 환호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30명이 넘는 엄마들은 이 상황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건 엄마들이 다니던 1990년대의 국민학교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곤 한 일이었으니까.
이 배려도 차별도 무시도 불평등도 아닌 부조리한 소셜 다이내믹스를 겪는 건 그 누구보다 여자 아이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
본인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요행과 부당한 배려를 기대하게 만들고,
결과에 승복하는 연습의 기회를 잃으며,
결국 사회에서의 경쟁에 준비되지 못한 자로 남는다.
그것이 어쩌면 뿌리 깊은 성차별이며 그것이 진짜 가스라이팅이다.
왜 여성할당이 모든 영역에서 당연해지는가.
왜 여성성 자체가 소수화 약자화 되는가.
카말라 부통령의 여성성은 핸디캡인가 특권인가.
이제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혜 받거나 배려받지 않았다는 것까지 증명 해 내야 하는 시대다. 이걸 깰 수 있는 힘은 오직 여성 자신의 의지에서만 나오며 특히 여성 집단이 아닌 개개인의 능력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야 진짜 싸울, 제대로 이길, 무엇보다 함께 이룰 준비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딸에게 약자화 된 여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남성과 사회를 적대시하도록 암시하지 않는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이해하고 본인의 여성성을 사랑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려고 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잘 알고 활용하여 배우고 협조하는 것이 내 딸의 삶에 가장 쉽고 유리한 방식이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의 기쁨을 누리는 것 또한 여성성과 남성성 공통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딸아,
너는 부디 유능하게 반짝이고 정직하게 성취함으로 진정 빛나는 여성이 되어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