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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재 Dec 16. 2021

처음 본 사람과 영원히 헤어졌습니다.

소개팅 후에 남겨진 것들


이제 슬슬 가볼까요?


두 번 다시 마주하지 않을 사람과 밥을 먹고, 기억 저 너머 사라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너무 일찍 일어나면 실례가 되진 않을까, 치열한 눈치전이 끝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가세요?”

“지하털 타고 가려구요.”

“전 근처에 버스가 있어서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거짓말이다. 사실 지하철이 가장 빠르다. 혹여라도 동선이 겹치면 서로 불편할까 나름의 배려였다.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오늘도 망했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ENFJ에게도 생면부지의 남과 시간을 보내는 건 괴로운 일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상대방과의 카톡과 번호를 차례차례 지워나갔다.



시계는 앞자리가 두 번 바뀌어 있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알림들이 테트리스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중요한 내용들은, 물론 없었다.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문자가 눈에 띄였다.


00카드 승인
56,000원
일시불


파스타를 두 개만 시켜도 5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시대다. 술까지 곁들인다면 며칠 동안은 자체 외식 금지령이다. 불현듯 지난주 옆팀 대리에게 축의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구차하지만 아까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신 돌려받지 못할 돈, 그리고 시간들.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뭘 할 수 있었을까. 코인? 주식? 사회초년생에게 5만 원은 꽤 큰돈이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주말 이 시간의 1호선은 항상 그랬다. 백팩을 멘 사람들 사이를 신경질적으로 비집고 들어가며 괜스레 화풀이를 한다. 제일 좋아하는 자리는 노약자석 옆 기둥, 나만의 공간을 찾아 편한 자세로 몸을 기댄 채 인스타를 열었다. 스토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친구는 여자친구랑 또 어디론가 여행을 간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다들 어찌나 알아서들 잘 만나고 다니는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마치 누가 머리에 총이라도 겨누겠다고 협박이라도 한 듯 커플들끼리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찬다.



서울에 넘치는 게 사람이건만 나와 맞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단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다. 외로움이었다. 주말은 항상 친구와의 약속이나 소개팅으로 채워져 있었다. 평일엔 퇴근하고 운동, 주말에는 소개팅. 이렇게 일주일을 살다 보면 시간 감각이 점차 무뎌졌다. 오늘이 며칠인지는 월급날이 아니면 알 바가 아니었다. 무슨 요일인지만 기억하면 될 뿐이었다. 찍어내듯 반복되는 하루, 일주일, 한달이 넌더리가 났다. 그나마 소개팅은 일종의 일탈이었던 셈이었다. '이번 정차 역은 회기, 회기역입니다.' 잡념은 지하철이 멈추며 끝이 났다.


집에 도착해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 잘 입지 않는 셔츠는 대충 벗어 세탁기에 쑤셔 넣었다. 긴장이 풀리니 허기가 찾아온다. 아까 먹은 파스타는 영 별로였다. 배달 어플을 켜고, 마라탕을 주문한다. 맵기는 2단계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엔 역시 매운 게 직빵이다. 마침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야 소개팅 어땠어?"

"망했지"

"ㅋㅋㅋㅋ 그럴 줄 알았다. 이번이 몇 번째냐"

"그럼 너가 소개해 주든가"


이럴 거면 혼자 살까, 늙으면 나랑 같이 살자고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하다가도, 진짜 그렇게 되면 어쩌지란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거나, 또는 내가 맘에 들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뭐가 문제일까? 눈을 낮춰야 하나?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감정이 메말라 버렸나?


그렇다고 없는 마음이 노력으로 생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연애 감정이란 계획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소나기였으니까. 피할 틈도 없이 나를 흠뻑 적시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스며들어 있는 사람. 마음의 조각이 꼭 들어맞는 그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비가 올만한 곳으로 찾아가야 했다.



복권과도 같았다. 제발 한 번만 걸려라 기도하며 끊임없이 은색 스크래치를 지우는, 그러나 어김없이 '꽝'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또다시 긁어봐도 여전히 '꽝'. 나도 누군가에겐 꽝이었을 테지. 오늘 만난 상대도 집에 돌아가 하루가 최악이었다고, 소개팅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며 친구와 평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띵-동 주문한 음식이 왔다. 식탁에 앉아 비닐봉지를 풀었다.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세팅하고, 마라탕을 입에 넣는다. 얼굴을 타고 땀이 한 방울 쭉 흐른다. 매운 걸 먹으면 땀이 비 오듯 나는지라 밖에선 좀처럼 먹기 힘든 음식이다. 혼자만의 시간. 긴장에서 풀려난 자유를 온몸으로 만끽해본다. 누군가 부모님은 가장 성공한 커플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딘가에 있겠지. 그런 사람' 일단은 배고프니 밥부터 먹자.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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