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대에도 전설이 있다. 대청호수를 굽어보고 서있는 구룡산 허리춤의 천
년고찰 현암사에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방문했다. 원효는 대웅전에서 정면
을 바라보며 "천년 뒤 물이 차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 듯 국토의 중심이
요 국왕이 머물 자리"라고 예언했다. 원효가 예언한 그 자리가 청남대다.
천여 년 전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길지(吉地)였던 청남대의 당초 이름
은 영춘재(迎春在)다. 봄을 맞이하는 곳이다. 새 봄에 대통령의 기(氣)가
가득 담긴 길을 걷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다.
(청남대 대통령길의 들머리인 메타 스쿼 이아 나무 앞 연못)
옛 대통령 별장인 충북 청주의 '청남대'엔 전국 유일의 '대통령길'이 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길이다. 원래는 청남대를 만든 장본인인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길을 포함해 여섯 개 코스가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길은 문재인 정부 들어 정치적인 이유로 사라졌다.
두 코스는 두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 채 '호반산책길'이 됐다.
여섯 개 코스를 이으면 대략 10.5km로 부지런히 걸어도 3시간 30분은 걸린다.
다섯 개 코스는 길이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산길이라 노약자가 걷기엔 난이도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하늘이 맑은 날 정상 전망대에 올라가면 마치 경남 통영 미륵산 정
상에서 한려수도를 보는 것처럼 대청호의 빼어난 뷰를 만끽할 수 있다.
(호반산책길로 이름이 바뀐 옛 전두환 대통령길)
4월의 맑은 휴일에 '대통령길'을 걸었다. 이날 청남대는 비교적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탐방객들이 많았다. 탐방객들은 주로 대통령 별장과 대통령 기념관, 메타스쿼이아 숲과 연못에 몰려있었다. 이들 중 산책길을 걷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이날 6코스 모두 걷기엔 시간이 맞지 않아 옛 전두환 대통령길과 김영삼^김
대중 대통령길을 걸었다.
호반산책길은 메타세쿼이아 숲에서 시작된다. 숲 앞에는 음악분수가 설치돼 있고 오른쪽에는 대통령 기념관이 있다. 이 코스는 1.5km로 호수를 끼고돌아
대통령 별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별장과 가까워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이 휴가를 맞아 청남대를
방문하면 가족 또는 지인들과 가장 많이 산책했던 길이었을 것이다. 코스도
생긴 지 가장 오래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부인^아들과 함께 이 길을 자주 걸으며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코스 중간에 사진이 걸려있다)
(김영삼 대통령길 옆 휴게소(옛 골프장 그늘집) 데크에서 바라본 호수)
춘분이 코 앞이라 기온은 따뜻하고 호수엔 윤슬이 아지랑이처럼 반짝였다.
겨우내 메말랐던 나무 가지도 물이 올라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이 길은 진보성향 시민단체의 반발로 길 이름에 '전두환'을 지웠다고 하는
데 청남대가 생긴 배경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대 초반 국가보위 상임위원장 시절 충북 보은에 큰 수해가 발생하자 헬기를 타고 현장을 방문했다. 현지시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하늘에서 본 대청호수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이곳에 대통령 별장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처음엔 영춘재였지만 1983년 이름을 '남쪽 청와대'라는 이름의 '청남대'라고 지었다. 청남대가 생긴 배경이다.
이후 청남대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네 명의 대통령이 이용(89회 472일간)하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충북도에 관리권을 넘겨준 후 일반에 개방됐다.
이후 청남대는 대통령 별장으로서 역할을 끝났지만 그 들의 체취와 에피소드는 청남대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있다.
길은 한적했다. 숲 속 산수유나무엔 꽃이 멍울을 터트리고 샛노란 얼굴을
드러냈다.
꽃이야 때가 되면 당연히 만발하지만 유독 처음 핀 꽃이 사랑받게 마련이
다. 더구나 겨우내 추위에 떨면서 앙상해진 나무에 물이 올라 봄꽃을 피우
니 더 반가울 터였다.
마치 첫눈이 내릴 때의 설렘처럼 성급하게 핀 꽃을 보면 걸음을 멈추게
된다. 열흘이 지나면 청남대 대통령길은 봄 꽃이 본격적으로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전두환 길이 끝나는 지점이 대통령 별장 뒤편이다.
별장엔 이곳에 머물렀던 대통령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탐방객들로 붐볐지만 후원(後園)은 조용했다.
백매(白梅)와 산수유꽃이 만발한 후원에는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전속 사진사가 무료한 얼굴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길을 지나면 1km 남짓 한 김영삼 대통령길로 연결된다.
김영삼(YS) 대통령길은 청남대 내 옛 골프장을 지나는 길이다. 골프장이라야
파 4 한 홀 정도 면적이다. 이곳에서 대통령들은 방향에 따라 다섯 개의 티
박스를 설치해놓고 라운딩을 즐겼다.
군정종식을 외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던 YS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청남대만큼은 퍽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재임 시절 김해를 비 롯 4곳의 대통령 별장을 폐쇄하고 청남대만 남겼다.
YS는 이곳에서도 매일 새벽 조깅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으며 골프를 하고
그늘 집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휴가를 보냈다. 그래서 코스 이름도 김영삼 대통령길
로 정했다.
대통령들이 운동을 하고 휴식을 취했던 그늘 집 발코니에서 잠시 앉았다.
빼어난 전망이다. 그늘 집 아래쪽에는 모터보트를 탈 수 있는 시설이 아직
도 있지만 탐방객들은 그곳에 접근할 수 없다.
그늘 집 옆에는 수령이 수십 년 된 커다란 능수버들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
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호수 풍경도 일품이었다.
이 길에서 사열하듯 줄지어 선 메타스콰이어 왼쪽의 잔디밭이 옛 골프장이다.
(김대중 대통령길 진입로)
넓은 잔디밭은 여름엔 재즈 토닉 행사를 하거나 가을엔 국화축제를 열리는 이
벤트 행사장으로 변했다. 옛 골프장을 굽어보고 있는 산허리의 1km 코스가
노무현 대통령길이다. 노무현은 자전거를 즐겨 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내걸린 숲길 대신 김영삼 길에서 페달을 밟았을 것이다.
청남대의 산파역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딱 하룻밤만 지냈다. 그런데도 전두환 길은 없애고 노무현 길을
만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호수를 감상하며 김영삼 대통령길로 10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초가정 너머
에 숨은 김대중 대통령길 입구가 보였다.
김대중(DJ) 대통령길은 2.5km의 등산로다. 6개 코스 중 가장 난이도가 높다.
궁금했다. 왜 하필 가장 힘든 코스에 DJ의 이름을 붙였을까.
DJ는 대선에서 박빙으로 낙선한 1년 뒤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
을 건졌으나 평생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DJ가 청남대에서 휴가를 보낼 때 산책길은 걸었지만 등산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굴곡이 심하고 인동초 같은 DJ의 삶을 반영해 코스를 정한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길은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초입 계단만 645개다.
물론 길지 않을뿐더러 콘크리트 계단으로 만들어져 산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면 산행 기분을 느끼며 쉽게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복장도 갖추지 않은 채 멋모르고 이 길을 나섰다가는 고행길이 될 수 있다. 산등성이를 타고 꾸준히 오르막을 타기 때문이다.
숨을 헐떡이며 첫 번째 언덕을 올라서니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이 산 진달래다.
주로 4월에 자줏빛을 띤 빨간색으로 피는데 벌써 산뜻한 얼굴을 내밀었다.
앙증 맞고 화사한 꽃에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렀다. 봄철 산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우측 철책 너머엔 호수가 강처럼 흐르는듯했다.
(김대중 대통령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청호)
능선 오솔길은 호젓했다. 며칠 전 비가 와서인지 숲향도 코를 스쳤다. 아마
봄내음 일터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청남대와 호수가 보였다.
아쉬운 점은 등산로지만 걷기 쉽게 인공구조물을 너무 친절하게 조성해 놓
았다는 점이다. 업다운이 심하기는 하지만 나무계단을 지나치게 설치한 것
은 예산낭비다. 편의성을 고려한 것은 이해가지만 산에 오를 땐 흙을 밟을
수 있어야 한다.
제1 전망대를 지나치고 정상에 위치한 제2 전망대에 오르니 대청호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남해 고산에 올라 다도해를 보는 기분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에서 이런 풍광을 감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다만 미세먼지가 많아 전망이 산뜻하지 않았다.
(청남대 주차장에서 바라본 대청호 낙조)
내려가는 길의 끝은 청남대 입구 옆 주차장으로 이어졌다.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6시가 가까워지면서 땅거미가 내려왔다.
임도 위에 겨우내 떨어진 낙엽들이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산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날아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서쪽 하늘 구름 속으로 숨던 석양이 호수 위에 황금빛 조명을 비추었다.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림이다. 6km에 달하는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길의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코스 / 청남대 주차장~메타 스쿼 이아 숲^연못~전두환 길^노태우 길~김영삼 길~김태중 길~청남대 주차장(6km)
*tip / 청남대 대통령길은 풀코스를 걸어도 좋지만 시간과 체력에 맞게 골라 걸어도 된다. 호반산책길(전두환^노태우길)은 호수를 바라보며 그늘진 숲길을 걷는 코스라 사계절 언제 걸어도 좋다. 김대중 대통령길은 봄^가을에 걷기 좋은 짧은 등산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