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인생의 고비에서 길을 걸을까

by 박상준

30여 년간 직장생활을 끝내고 은행에서 명예퇴직한 50대 지인은 한동안 깊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단조롭고 지겨운 업무에서 해방된다는 홀가분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를 압박한 것은 새털처럼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업무적으로 알던 사람들도 점점 소원해졌다.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산 덕택에 경제적인 걱정은 없고 명문대를 나온 자녀들도 제 각기 둥지를 떠나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가 퇴직후에 원했던 그림이지만 문제는 자신이었다.


누군가는 배부른 고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사회에서 잊히고 할 일없는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현실에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풀코스 도전이다. 800km를 걸으며 잃었던 자아(自我)와 자신감을 찾을 작정이다. 오랜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자신에 대한 선물이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19가 웬만큼 잡히면 바로 떠나기 위해 매일 오전 10km를 걷고 있다.

폭설이 쌓인 강원도 안반데기에서

스페인엔 산티아고 길이 있지만 미국엔 퍼시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이 있다.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태평양 연안을 걷는 무려 4,285km로 '악마의 코스'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432km인 서울 부산의 10배나 길다.


그 길을 홀로 完走(완주)한 세릴 스트레이드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와일드'다. 와일드는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잃고 삶의 버팀목이 됐던 어머니마저 하늘로 보내며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한 세릴이 멀고 험난한 길을 걸으며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한 분투기다.


사람들은 왜 인생의 고비에서 길을 걸을까. 그것도 아주 먼 길을. 그 길의 끝에 서면 삶의 행로가 달라질까. 길을 걷는 것은 마음을 추스르고 무언가 깨우치는 일이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좌절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거나 우울증에 걸리고 술과 노름, 마약 등 무엇인가에 중독돼 파멸해가는 경우도 있다.


먼 길을 걷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수반한다. 인내력과 의지의 한계를 시험한다. 그 옛날 순례자들은 수천 킬로를 걸으면서 종교적인 신념을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은 '화두(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 하는 문제)'를 잡고 내면 깊숙이 담겨있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러 다리를 휘청거리게 할 만큼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떠난다.


소설가 정유정이 난생처음 해외여행으로 히말라야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작가는 글을 써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갑자기 에너지가 소진돼 글이 써지지 않았다. 원고지만 바라보면 머리가 하해 지는 번 아웃이 찾아온 것. 글이 나오지 않았을 때 작가는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스러웠을까.


정유정은 '히말라야 환상방황'이라는 책에서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렸다. 이야기 속 세계, 나의 세상, 생의 목적지로 돌진하던 싸움꾼이 사라졌다"며."나 안나푸르나 갈 거야.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썼다.


동네 뒷산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는 40대 여류작가가 화장실이 없는 척박한 산길에서 변비로 고생하고 새로 산 등산화가 닳고 닳아 주둥이가 악어 입처럼 벌어진 채로 험준하고 높은 설산을 걷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은 절로 키득키득 웃게 만든다.


그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이인 동시에 어른인 셈이다. 삶을 배우면서 죽음을 체득해 가는 존재. 나는 안나푸르나에서 비로소 혹은 운 좋게 어른의 문턱을 넘겼다"라고 했다.


게티이미지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염없이 외로운 산 길을 걷고 발 디딜 곳 없는 깎아지른 벼랑을 오르거나 눈 덮인 넓은 평야와 깊은 숲 속에선 방향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여러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다. 나침판을 꺼낸다고 길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인생의 길에선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선택이 올바른 길인지 모르기 때문에 늘 방황하게 된다.


걷는 것은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세릴은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 등에 지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중엔 버리는 게 아까워서 쓰지도 않으며 움켜쥐고 있는 물건도 많다. 아마 그 길의 끝에서는 불필요한 물건과 함께 켜켜이 쌓여있는 회한(悔恨)과 상처도 훌훌 털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삶의 벼랑 끝에서 스스로 극한체험을 이겨낸 사람은 다를 것이다. 언론인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뒤 제주 올레길을 만들었고 정유정은 감동을 주는 책을 펴냈으며 세릴 스트레이드는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유명인사가 됐다. 아마 내 지인은 젊은 시절의 자신감을 되찾아오지 않을까.


그렇다고 굳이 먼 나라까지 찾아갈 것도 없다. 백두대간 트레일, 지리산 둘레길, 제주올레길, 해파랑길에서 맞이하는 일몰과 일출도 가슴을 벅차게 한다.


'인생에서 중대한 변화의 물꼬를 터야 하는 건 퍽 겁나는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건 변화하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하는 삶이다" 먼 길의 끝에서 과거와 다른 자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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