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패딩 말고 의자에 걸어두었을 때 땅에 끌리지 않는 숏패딩이 사고 싶다는 딸의 요청에 쇼핑에 나선다. 큰아들은 언제부턴가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며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낸 지 오래.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넌 아직 덜 필요하구나’싶어 두고 나가기로 결정. 요 며칠 피곤해 보이는 남편에게는 집에서 쉬고 있으라며 쿨하고 배려심 넘치는 아내 코스프레를 하며 둘째와 셋째만 데리고 외출 길에 나섰다. 셋이 있을 땐 그렇게들 싸우는데 둘째와 셋째만 있으면 그나마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린다. 가는 차 안에서 자기들만의 메들리를 부르며 깔깔거리고 룸미러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이 옷 저 옷 비교하고 입어보는 동안 한 시간이 넘게 흐르고 아이들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때,
“서점 가자! 가서 너희 읽고 싶은 책 한 권씩 사줄게!”라는 말에 다시 에너자이저가 된 아이들. 또다시 흥에 겨워 서점으로 향했고, 만화책을 잘 사주지 않는 엄마가 오늘은 ‘기분이다, 만화책 허용!’이라는 말에 아이들의 흥분 지수는 점점 더 오른다. 계획대로 모든 쇼핑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저어어어기 올리브영이 보인다.
‘아, 올영세일이 오늘까지지.’
화장품에 대한 지식도 전무할 뿐더러 평소 색조화장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사봤자 기초화장품 몇 개가 다인데 세일 기간을 놓치면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라 세일 기간만큼은 들리는 곳. 이번에도 필요한 몇 개의 항목을 리스트업 해놨기에 잠시 들렀다 갈까 싶다가도 두 아이들 모두 데리고 가면 정신이 혼미해져 제대로 된 쇼핑을 할 수 없을 게 분명하고.
“기쁨이, 행복이 차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사준 책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엄마 저기 올리브영 보이지? 거기 가서 얼른 필요한 거 사가지고 올게.”
만화책을 손에 쥔 행복이는 재고 따질 필요 없이 무조건 오케이.
“엄마, 나도 올리브영 갈래 가서 립스틱 구경하고 싶어.” 화장품에 관심 없는 녀석인데 올리브영만 간다고 하면 꼭 따라나서는 기쁨이.
“엄마. 나 혼자 차에 있을게, 갔다 와.” 쿨하게 허용해 준 행복이는 차 문을 열고 쏙 들어간다. 혼자 차 안에서 기다린 적도 있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에 아이 혼자 차에 태웠다.
“엄마, 키는 내가 가지고 있을게.” 이미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30%의 정신을 흘려버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키를 행복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분명 목록을 적어갔기에 10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 웬 걸. 역시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뭐가 좋은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발라보고, 딸내미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화장품을 사러 왔다는 사실이 놀라운지 물끄러미 쳐다보다 슬쩍 립스틱 코너 앞에 서더니 나에게 이거 발라봐라, 저거 발라봐라. 나는 또 좋다고 함께 동조한다. 집에 가기 싫다는 딸을 겨우 데리고 나왔고 스타벅스는 또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맞은편 스타벅스에 얼른 들어가서 커피 한 잔만 사 온다는 걸 갑자기 텀블러가 가지고 싶다며, 꼭 ‘starbucks’가 새겨져 있으면 좋겠다는 딸의 말에 또 열심히 텀블러 구경까지 한다.
룰루랄라 딸과 함께 서점 주차장에 도착. 차 문을 열어보는데. 잠겨있다.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나? 열심히 창문을 두드려 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얘가 책 보다 잠들었나?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차 문을 두드려 보는데도 반응이 없다. 아, 큰일 났다. 진짜 깊게 잠들었나 보다. 문을 두드리기를 수십 번. 선팅 된 창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차 앞쪽으로 가서 보니 아들이 산 책과 들고 온 장난감만이 시트에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아이는 없었다. 화장실에 갔나? 아니면 심심해서 서점으로 다시 들어갔나? 스멀스멀 몰려드는 불안감을 안고 서점으로, 화장실로 뛰어가 보지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 내가 키를 왜 아들에게 줬을까. 불안하다. 누가 아이 혼자 있는 모습을 보고 데리고 갔나? 어떡하지. 이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지잉~’
모르는 번호가 뜬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는데,
“엄마”
“행복아!! 너 어디야?”
“엄마랑 누나가 너무 안 와서 내가 올리브영으로 갔는데 엄마가 없어서....(울먹울먹)”
“거기가 어딘데? 설명해 봐 엄마가 갈게”
“여기가 어디냐면....”
전화기의 주인인 듯한 여성분이 위치를 설명해 주셨고 한걸음에 달려간다.
큰 트리 앞에 홀로서 있는 캐빈을 만난 엄마의 심정이 이랬을까. 멀리서 보이는 아들은 외투도 안 입고 발끝만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행복아!”
엄마를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달려와 안긴다. 혼자 얼마나 뛰어다닌 건지 안기는 아들의 등에선 후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혼자 나오면 어떡해. 그리고 옷은 왜 안 입고 나온 거야. 미안, 엄마가 너무 늦었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엄마가 안 와서 내가 찾으러 갔는데 나는 돈도 없고 물건도 안 살 거니까 들어가면 안 되는 줄 알고 다시 나왔는데....”
두서없이 주절주절 말하는 아들.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가 너무 안 와서 찾으러 가기로 결심, 주차장에서도 보이는 올리브영으로 걸어가는데, 가는 길에 있는 스타벅스 매장에 엄마랑 누나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더란다. 자기는 돈도 없고 커피를 살 것도 아니라서 들어가면 안 되는 줄 알고 머뭇거리다 길 건너 올리브영으로 향한다.(지금 생각해 보니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였는데.. 차도 많이 다니는 곳을 혼자 건넜다니) 거기서도 차마 들어갈 수는 없고 돌아 나오는데 어느 길로 왔는지 알 수 없어 일단 직진, 하필 향한 방향이 주차장과 반대 방향이었던 것. 찰나의 순간 서로의 길이 엇갈린 듯했다.
내가 사고 싶을 때, 먹고 싶을 때 쉽게 사고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지내는 게 아니다 보니 나부터가 번쩍번쩍 한 도시로 나오면, 게다가 밤에 나오면 집에 가기 아쉬운 마음에 꼭 어디라도 하나 더 들리고 싶어 진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올리브영 매장에 안 가면 어때,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될 것을. 커피 한 잔 안 마시면 어때 이미 프리퀀시도 다 모은 것을. 어쩌면 아이들 옷을 핑계 삼아 나의 도시 생활에 대한 욕구를 채운 걸지도 모르겠다. 짧지만 아찔했던 순간. 아들을 잃어보고 나니 올리브영 쇼핑백과 스타벅스 케리어가 참 야속하다.
(하지만 난 다음 올영세일 기간이 되면 또 매장을 기웃거리고 다음 프리퀀시를 모으기 위해 스벅 매장을 들락날락하겠지. 이런 자발적 노예 같으니라고)
참, 저희 아이에게 핸드폰 빌려주신 붕어빵집 사장님 감사합니다. 저는 지나가는 분이 전화만 빌려주시고 가신 줄 알았는데 붕어빵집 사장님께 빌린거라고 하더라고요. 다음날 인사드리려고 갔더니 문이 잠겨있어 인사도 못 드렸네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