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실즈의 ‘스톤다이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부모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상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부모님, 특히 자신을 낳다가 죽은 엄마의 이야기를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 한다. 소설은 여주인공 ‘데이지 굿윌’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탄생의 순간, 자라는 과정, 결혼 등이 평범하지 않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그렇다고 개연성이 없다거나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엥?’했다가도 ‘흐음…’하고 묘하게 설득되는 부분이 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스토리라고 생각하다가도 세상에는 이상한 일이 많으니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이 있는가! 하고 수긍하게 된다.
또한 소설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어 주인공 주변인의 속내도 보여준다.
한 여자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을 보며 결국은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온전한 ‘사실’이 될 수 없고, 나의 기억, 남의 생각과 기억도 완벽한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은 사람과 사람, 시간과 시간, 사건과 사건이 얼기설기 섞여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데이지 굿윌’의 일대기는 인생이란 엇인가? 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나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아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모르겠다는 것.
캐럴실즈의 ‘스톤다이어리’ 중에서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뭔가 투명하리만큼 단순한 생각, 자신이 늘 알고 있었던 생각, 그러나 결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던 생각.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인생은 그 최후의 어둠을 향해 곧장 전진하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딱 부딪히는 극단 저 긴 상황. 그 둘은 숨결로도, 한 번의 눈 깜박임으로도 구분할 수 없다. 인간은 오로지 그 최후의 순간까지 음식과 일과 날씨와 대화의 일상적인 음악에 맞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잃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