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재미있는 수업이 좋은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수업이 좋은 것 같아요?’
‘똑똑한 척을 할 거예요? 예쁜 척을 할 거예요?’
‘작은 집에 살다가 거지가 되는 게 나은 걸까요? 부자로 살다가 거지가 되는 게 나을까요?’
5학년이 된 첫째 아이가 요즘 하루에 한 번은 이런 식의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질문을 한다.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질문’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나 자신은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이 어는 정도는―동물의 실존과 달리―인간의 실존에 내재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고 본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지능을 넘어―지능은 동물도 갖고 있다―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하지만 설사 균형을 찾았다 해도 그 균형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고,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분열을 해결하는 수단인 이 대답들은 인간 본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정의를 낳는다. 분열과 불균형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근절할 수 없는 부분이다. “ (책 중에서)
에리히 프롬은 인류가 존재한 이후 인간에게는 변치 않고 동일하게 남는 것, 즉 본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에게는 새로운 업적, 창의성, 생산성, 진보를 가능케 하는 다수의 가변적 요인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변적 요인 때문에 인간은 계속적인 불균형 상태에 놓이게 되고 이런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질문하고 이 질문들은 인간 본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정의를 낳는다고 말한다.
아이가 했던 질문들을 생각해 보았다.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들이 많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등등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이유를 대답할 수 있다. 첫째 아이는 이런 질문들이 자꾸 생각나고 그 대답이 궁금하다고 한다. 아이는 질문들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구하고 알아가고 있는 중일까?
그리고 아이의 질문에 ‘글쎄, 모르겠네…’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던 나는 단순히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정말 몰라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창성의 결핍은 감정과 사고뿐 아니라 소망에도 해당된다.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내기는 특별히 힘겹다. 현대인들은―무언가 있기는 하다면―너무 바라는 것이 많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모조리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책 중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독창성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 생각이 그의 활동,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의 느낌과 생각은 온전히 나로부터 온 것일까? 나는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 것일까? 아이의 질문이 나를 이런 질문으로까지 끌고 왔다. 아이의 질문을 절대 무시하지 말자. 거기에는 심오한 진리가 있을 수 있으니까.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 (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