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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오자마자 경찰서 간 남자

아일랜드에서의 잊을 수 없는 그 첫 날

by 관새로이

여권을 잃어버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평화롭기만 했던 더블린이 갑자기 낯설고 차가운 도시처럼 느껴졌다.


우선 근처 경찰서로 달려갔다.

버벅거리는 영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경찰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번역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이런 내 영어실력이 정말 답답했던 순간이었다.

경찰관은 내 신상 정보를 하나하나 물으며 어떤 처리를 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남자가 옆 문을 열고 나오더니 이 남자에게 추가적인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이 남자는 나에게 공항에 등록된 분실물 리스트를 보여주고 문의 전화번호도 알려줬다.

또 분실물 리스트가 금방 갱신되지 않는다며 기다려보라고 했다.

이 상황이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받은 번호로 공항에 전화를 걸었지만, 하필 주말이라 연락이 안 됐다.


그래도 시내에 나온 김에, 예약해뒀던 학생 교통카드를 찾으러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또 주말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좌절이 밀려왔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더블린의 한 거리, 방황하던 나

난 넋을 잃은 채 주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큰 캐리어와 가방 두 개를 들고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때, 조용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일랜드가 나에게 환영인사를 하는 듯 했다.

'신고식 한번 인상 깊네'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화려하고 멋있는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정신이 너무 없어, 첫 유럽의 풍경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처음으로 유럽을 밟았던 느낌과 감정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예쁘고 인상적이었기에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 사진 속엔 당시의 긴박함과 혼란스러운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찍었던 사진 (트리니티 대학교)

계속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오늘 약속했던 아일랜드 가정집에 가야만 했고 그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어떠한 도리가 없어서 결국 다시 공항으로 가보기로 했다.

공항에 가서 직접 부딪히며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왔던 길을 유심히 살펴보며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분실물 관리를 하는 문의처로 가서 내 순서를 기다렸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난 또 시내로 돌아가야만 했다.

너무 불안하고 지쳐있었다.

아일랜드에 온 첫날부터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여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닥칠지 생각해 봤다.

예약해두었던 여러 행정절차들이 모두 무산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몇 달 동안 일자리 없이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졌다.

더블린 공항 속, 헤메는 나

버스 안에서 관련 정보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항공사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내 여권을 습득했으니 찾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너무 기쁜 마음에 적혀진 번호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락해도 받지 않자 다시 또 공항으로 갔다.


항공사 고객센터에 도착해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고,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이 때, 정확히 알아듣질 못해서 여러번 되물었다. 결국 반신반의한 채로 내가 이해한대로 행동을 옮겼다.

몇 분 뒤, 다행히 한 직원이 내 여권을 들고 나타났다.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권 찾았다!"


말도 다 못할 만큼 행복했다.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부족한 영어를 걱정하면서 아일랜드에 왔는데 그럴 틈도 없이

경찰, 이메일, 전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나 자신이 놀라웠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경찰서를 간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나의 아일랜드 첫인상이었다.


기쁜 마음을 안고 예정된 아일랜드 가정집으로 향했다.

따뜻해 보이는 아이리시 노부부가 나를 반겨주었고, 함께 일하게 될 호주 친구와도 인사를 나눴다.

다 함께 장을 보고, 나를 위한 저녁 식사도 준비해 주었다.

여기서 또 익숙한 위기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영어가 너무 안 들렸다.

대화 속에 나는 아주 과묵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다음 주부터 난 4주간 아이리시 부부와 함께 정원 일을 해야 했다.

또 동사무도 가야 되고 집도 구하고 면접도 보며 일도 구해야 했다!

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일랜드 가정집에 있는 작은 카라반 속 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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