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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송이 Apr 21. 2024

학교에서 훔쳐도 되는 것

저도 종종 집으로 가져오거든요.


고백한다.

나는 어린이의 소중한 걸 훔쳤다. 아니, 주웠다…



그 날은 아주 바쁜 날이었다. 늘 그랬듯이.






출근하자마자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도 전에 켠 업무 메신저에는 각종 부서에서 날아온 쪽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각종 안내사항을 업무 수첩에 옮겨 적고, 수업하고, 수업하고, 수업하고... 쏟아지는 어린이들의 질문에 답하고, 답하고, 답하고... 싸운 아이들 불러내어 얘기 듣고, 말하고, 듣고, 말하고...




'학기 초 터널을 지나는 모든 담임교사들이 같은 처지겠지? 나만 이런 건 아니야.'라는 삼삼한 위로는 별 효력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힘들다고 해서 내가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말이다. 매초마다 온몸에서 에너지가 쑥쑥 빠져나갔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로 눈앞에 주어진 1분 1초를 쳐내다가 종례시간이 되었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했고 빽빽했던 교실에 혼자 남았다.



휴, 오늘도 전쟁 같았다며 한숨 돌리려는 찰나, 앞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똑 똑 -





'누가 가방을 두고 갔나?'


그 순간 앞문이 스르륵 열렸다. 빼꼼 고개를 내민 건 작년 우리 반 학생이었다. 이 어린이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신기한 재주를 가진 어린이다. 왜냐하면 그저 바라만 봐도 내 얼굴에 미소가 퍼지기 때문이다. 풀잎 같고 꽃잎 같은 어린이. 아 내 마음속에 사랑이 남아있었구나! 느끼게 만들어주던 어린이.


어떤 사람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다니! 내 자식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순도 100퍼센트의 깨끗한 사랑이 퐁퐁 솟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종종 기분 좋은 의문이 들게 했던, 바로 그 어린이가 우리 반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떤 순간에는 나보다 어른스럽고 꼼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본인에게 주어진 무엇이든 책임을 가지고 해냈던 아이. 친구에게도 양보할 줄도 알고 때로는 되려 선생님을 위로할 줄도 알던 아이. 일기장 가져가기를 깜빡했으면 집에 있는 공책을 찢어서라도 숙제를 해오던 아이.


그렇게 자신에게 솔직한 채로 정정당당히 보낸 하루들은 내면에 쌓이고 쌓여 사람을 빛나게 해주나 보다. 웃을 때마다 맑고 뽀송하게 빛나는 그 아이를 보며, 안정된 가정환경과 성실한 하루들이 쌓이면 사람이 얼마나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업무적인 스트레스인지 개인적인 스트레스인지 정체를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실 근래 내 하루에는 힘든 일들이 아주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얇은 공책 한 권이라도 더 끼웠다간 우르르 무너질 것 같은 책장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하루 끝에서는 내가 진심으로 미소 지었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윤이 나는 어린이와 공유했던 시간. 굳이 기록하면서까지 불행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두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기록하면서까지 붙잡아두고 싶은 순간은, 누군가를 보며 환멸을 느낀 순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보며 사랑을 느낀 순간이다.


촘촘한 힘듦의 배열 속에서도 미소 짓게 만들어주었던 그 아이를 떠올리며 작은 소망도 품어본다. 나도 정정당당한 하루로 내면을 채워서 맑고 뽀송한 빛이 자연히 흘러나오는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한순간이라도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면 그날은 성공인 걸로 매듭 지으리라.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양귀자 <모순> -






작년 담임 선생님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방과 후에 잠깐 내 교실에 들러 인사해 준 어린이 덕분에, 참 중요한 사실을 두 가지나 깨우쳤다. 하루끝을 매듭 짓는 방법과 빛나는 사람이 되는 방법.



반짝반짝 빛나는 어린이는 이렇게 지나가는 길목마다 빛을 한 움큼씩 떨어트리고 다닌다. 학교에서 가져와도도 되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한 줌 집어 내 주머니에 쏙 넣었노라 고백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어준 당신도 주변을 잘 살펴보며 누군가 흘린 빛을 한 줌씩 모아보시길 바라며...



*물론, 그 빛은 차고 넘쳐서 흘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억지로 끄집어내서 훔치는 것이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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