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이야기 - 시카고 3
아버지는 삼성맨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삼성물산에 입사하여 근 20년을 근무했다. 한때는 물산에서 자동차로 스카우트되었었지만 삼성자동차 설립이 좌초되면서 물산에 머물렀고 아시아 외환위기를 즈음하여 자진 퇴사했다. 아버지가 삼성맨이었을 때 우리는 소니나 파나소닉 시디플레이어는 살 꿈도 못 꾸고 삼성제품만 써야 했다. 아버지는 삼성 내부 문화인 자가용 위계질서에 따라 한 번도 외국 차량을 몰아본 적이 없었다. 8-5 근무 (7시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1시간 수업을 시작으로, 8시-5시를 근무시간으로 하는 삼성 시스템)로 인한 습관으로 아버지는 아직도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한다. 나는 재벌회사의 군대 같은 사내 문화도 익히 들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퇴사 후 작은 사업을 가꾸기 시작해 '삼성 군인'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아버지는 삼성이 여느 일본 대기업과는 수준이 다른 글로벌화를 진행했다며 자랑스러워한다. 외국인인 내 남편도 작년에 MBA를 다니면서 다른 회사들과 함께 삼성 글로벌 전략그룹 (GSG)에 지원한 적이 있고, 시동생은 박사 과정 중 삼성전자 리서치부서에서 인턴십을 한 경험이 있다. 아버지가 삼성맨이었을 때 한국의 1인당 GDP는 1만 5천 불-2만 불 정도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GDP는 4만 불 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제적으로 따지고 보면 선진국에 들어선 지 오래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지금 내 주변에도 꽤 많은 선후배, 친구들도 삼성에 재직 중이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 가끔 사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물론 회사의 중심이 물산에서 전자로 바뀌었고, 삼성폰이 세계 점유율 2위를 차지하는 만큼 삼성은 이제 국내 회사가 아닌 글로벌 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삼성은 한국만의 대기업 문화를 고수하고 있다. 여전히 중앙집권적 사내 문화가 있고, '순서'라는 것도 존재하고, 주재원 문화로 인해 글로벌 회사이지만 비한국인이 진짜 주인이 되는 경우가 적다. 여성 임원의 수가 여타 글로벌 회사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고, 한국 본사에는 LGBTQ+ 정책도 없다. 한마디로 하드웨어적 요소는 껑충 뛰어올랐지만 소프트웨어적 요소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남편이 작년 여름 인턴십을 하던 직장에서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게 돼서 시카고로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더 옮기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부모님이 우리가 사는 모습도 볼 겸 관광도 할 겸 시카고에 왔다. 나의 가족은 특이하게 유럽에만 연이 있어 (나와 동생 모두 유럽에서 공부했다) 미국에 와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이번 미국 여행이 처음이었고, 어머니는 두 번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 미국 여행이란 나이 먹고 여러 가지를 처음 느끼게 되는 새로운 경험이다. 그만큼 미국에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점이 크게 다가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과 함께 시카고의 대표 거리인 미시건 애브뉴를 걸으며 시카고 트리뷴 건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시카고 트리뷴 건물 앞에 애플 매장이 하나 있다. 시카고는 지하 2층까지 겹겹이 쌓인 방식으로 만든 도시인데, 애플 매장은 지상에서 지하 1층 강변까지 통유리 건물로 건축되었다. 매장의 지붕은 맥북 에어 디자인을 본땄다. 건축의 도시인 시카고에 잘 어우러진 건물이다. 아버지가 잠깐 애플 매장을 둘러보더니 사진을 하나 찍어달란다. 그리고는 '매장이 참 멋지다. 삼성은 이런 매장 하나 못 만드나.'라고 한마디 하신다.
글세 왜 그럴까? 일단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애플은 단순 제조회사가 아니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함께 세계를 독점하고 있는 ios 운영체제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회사이며 기술을 집대성한 하드웨어의 디자인을 파는 회사다. 삼성은 하드웨어 회사고 애플은 디자인 회사이며 소프트웨어 회사다. 전혀 다른 회사이다. 애플 매장에서는 애플폰을 파는 게 아니고 애플폰의 디자인과 소프트웨어를 파는 것이기 때문에 건축의 도시인 시카고에서 애플 매장은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다시 반문한다. '전혀 다른 회사라고 치자. 그런데 스마트폰만 가지고 얘기해보면, 왜 사람들이 자꾸 애플폰을 살까. 기사에서는 새로 나온 애플폰이 참 안 좋다고 하던데...'. 그러게나 말이다... 삼성폰과 애플폰을 보면 모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을 집대성하고 있는데 왜 점유율 차이가 점점 벌어질까. 생각해보면 새로운 폰이 출시될 때마다 각 회사가 집중적으로 광고하는 부분을 보면 두 회사의 가장 큰 차이점이 나타난다. 삼성은 기술을 중심으로 홍보하고 애플은 시대감성을 중심으로 홍보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한 끗 차이로 몇 달 정도 차이를 두고 서로 엎치락뒤치락할 수 있는 것이 기술이다.
애플은 소프트웨어 회사로써 시대 감성의 철학을 위한 기술을 집대성해 나간다. 말은 거창하지만, 새로운 아이폰이 출시될 때마다 시대 감성을 캐치하기 위해 미세한 업그레이드를 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아이폰과 애플 와치에 들어가는 '여성 건강 연구' 기능 같은 변화 말이다. 이 기능으로 여성의 한 달 주기를 체온으로 기록할 수 있는데, 출산율이 낮아지는 이 시대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철학을 반영한 기술이 아닐까. 기술이 한 발짝 앞서 나가지 않아도 기존에 존재하던 기능과 함께 폰의 활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MZ 세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기능을 첨가하는 것이다.
미시건 애브뉴를 쭈욱 걷다가 우리는 세계에서 6개 매장뿐이 없다는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Starbucks Reserve Roastery)에 들어다 보았다. 메뉴를 보기 위해 QR코드를 찍어 메뉴창을 들어가는 동안에 우리는 애플폰과 삼성폰의 작은 차이를 발견했다. 애플폰은 QR코드를 찍어 클릭하면 바로 메뉴창으로 이동하는데, 삼성폰은 QR코드를 찍어 클릭하면 두 가지 옵션이 뜨는 거다. QR코드를 사진으로 찍을건지 아니면 QR코드 링크로 이동을 할지 선택하는 옵션이었다. 요즘 QR코드를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는 사람이 있을까. 철학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컨셉이 아니고 기술을 통한 막힘없는 일상을 추구하고픈 요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