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생일은 음력 2월25일이다. 48년 쥐띠인 아빠는 올해로 만75세, 우리나라 나이로 76세이다. 올해 양력 날짜로는 3월16일이었다. 중국에 있는 큰언니를 제외하고 작은언니, 남동생과 나는 주말인 3월18일에 영양에 있는 부모님댁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하루 일찍 금요일 오후에 출발했다. 오후 1시쯤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4시쯤 되니 아이들이 학원을 마치고 들어왔다. 수인이의 주문으로 집 근처 다이소에 들렀다. 깜짝 파티에 푹 빠져있는 수인이가 파티 용품을 골랐다. 코너를 옮겨 민주는 이천원짜리 안마기, 수인이는 영양갱세트를 할아버지 선물로 골랐다. 5시가 조금 넘어 다이소에서 출발했다. 영양에 도착하니 밤 9시반정도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수인이는 생일 파티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수인이의 재촉에 아침을 먹자마자 차 트렁크에 있는 텐트를 꺼내 마당에 펼쳤다. 텐트를 설치하는 것은 민주와 나의 몫이었다. 민주는 이제 나만큼이나 텐트를 치는 것이 능숙해졌다. 텐트를 다 치고 난 후 수인이를 불렀다. 수인이는 다이소에서 사온 소품들로 텐트 안을 꾸미기 시작했다. 풍선을 나누어 불고, 천정을 가렌더로 장식했다. 가운데에 설치된 테이블에는 남동생이 가져올 케잌이 놓여질 예정이다. 캠핑 때 쓰레기통 용도로 쓰는 바스켓안에 선물을 숨겼다. 빨간 장미꽃잎으로 바닥에 하트를 만들고, 남은 꽃잎은 테이블과 바닥 여기저기에 흩뿌렸다.
점심을 먹고도 한참이 지난 오후 세 시쯤 동생네와 언니네가 도착했다. 깜짝 생일파티는 저녁을 먹고 나서 진행하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삼겹살. 영양에 가면 한 끼정도는 빼놓지 않고 먹는 메뉴이다. 거실에 신문지를 10장정도 넓게 깔고 명절에 전 구울 때 쓰는 커다란 전기 불판에다 고기를 구웠다. 상 위에 음식을 차리지 않고 바닥에 놓인 전기 불판 주변의 신문지 위에다 음식들을 차리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나서. 아빠보다 수인이가 더 기다린 생일파티가 드디어 진행되었다.
“자 여러분 할아버지 빼고 다 밖으로 나가세요오.”
수인이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밖으로 이동했다.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닫아두었던 텐트의문을 열었다. 나는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한 두 조카들과 함께 케잌에 불을 붙이고 기다렸다.
“자 얼마 뒤면 할아버지가 입장합니다아!”
그 뒤로 등장한 아빠는 고깔모자에 파란색 대왕안경을 쓰고 환하게 웃으면서 텐트로 입장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아빠는 촛불을 후 불어 껐다. 수인이와 민주가 쓰레기통에 숨겨두었던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 아빠에게 전달했다.
나는 지난 2년정도 가족들이 다 같이 참석하는 모임에 가지 않았다. 아이들의 아빠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부터였다. 이혼을 합의하고 아이들과 관련된 일 외에는 남남이 되기로 한 것이 2021년 봄. 그 날부터 우리는 서로의 가족들과 연락을 끊었다. 엄마에게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렸다. 그 전 해부터 내가 아이들만 데리고 혼자 영양에 가서 일주일씩, 열흘씩 있다가 오곤 했었는데 엄마는 그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고 했다. “엄마랑 아빠는 말도 안해요.””아빠는 엄마한테도 무섭게 말해요.” 아이들의 말에 엄마는 표정이 굳어지곤 했었다.
엄마와 나는 보통 별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번 통화하는 것도 드물었다. 하지만 그 즈음에는 엄마에게 하루에도 두 세번씩 전화가 왔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자는지 통화할 때마다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답답한 마음을 어디다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전화를 한다고 했다. 나에게 위로를 하고 싶었을까 받고 싶었을까. 전화가 올 때마다 짜증내지 않기 위해 신경쓰면서 엄마를 달랬다.
그리고 8월, 엄마의 생일이었다. 엄마에게 생일에 영양 집에 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누구 누구 오는데?”
“민주랑 수인이랑 셋이서 가야지.”
“셋이서 올꺼면 오지마라.”
나는 엄마의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곧 다가온 추석에도 엄마의 입장은 단호했다. 넷이 아니면 오지말라는 것. 아이들은 아빠와 친할아버지댁에 가고 나는 혼자 추석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해 설, 아빠의 생일, 다시 또 엄마의 생일, 추석에 나는 영양을 가지 않았다. 명절이나 생일 같이 가족들이 다 모이는 날은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영양을 다녀왔다.
아빠는 막내 사위인 애들 아빠를 많이 아꼈었다. 과수원 일도 척척 잘 거들고 이리저리 대화도 잘 엮어갔다. 무뚝뚝한 네 남매보다 싹싹한 막내 사위를 더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위가 2021년 5월8일 안부전화 이후로 소식이 뚝 끊겼다. 이전에는 아빠가 먼저 전화를 하기도 했는데 엄마에 의하면 어쩐 일인지 아빠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에게 물어볼 법도 했을텐데 나에게도 무슨 일 있냐 물어본 적이 없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사물놀이패를 하면서 열흘간 전수훈련을 간다고 했을 때 심하게 반대했던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반대가 없었다. 대학교때 학고를 받았을때도,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않고 한국은행 계약직을 선택했을때도. 결혼을 할때도 그랬다. 엄마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작은 언니도 눈에 밟히고, 교제한 기간이 1년도 안되서 결혼을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아했다. 그때도 아빠는 마음먹었으면 하라고 했다. 이유를 따져 묻지도 않았다.
“니 요량대로 해라.” “다 지 요량대로 산다. 걱정하지마라.”
어렸을 때부터 아빠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요량’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요령의 사투리라고 되어있다. 지난 2년동안 가족 행사에 불참하면서 내가 과연 ‘요량대로’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었다.
그러던 지난 연말, 민주와 둘이 영양에 갔다. 엄마는 독감에 걸린 조카를 돌보기 위해 대구 작은언니네에 있었다. 금요일 밤 늦게 도착했다. 아빠는 혼자 거실에 놓고 쓰는 아빠의 침대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아빠가 보는 바둑 중계를 같이 보면서 와인을 나눠 마셨다. 다음 날 아침은 미리 사간 밀키트 설렁탕으로 해결했다. 아빠는 목욕탕을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짜파게티를 사왔다.
점심으로 짜파게티를 끓여 먹고부터 아빠는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구토도 했다. 그날 저녁 엄마가 왔고 아빠는 그 다음날인 일요일까지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 누워있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쿵! 소리가 났다. 아빠였다.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서 넘어졌는데 다행히 변기위로 주저 앉은거였다. 변기커버가 망가져있었다. 영화에서나 봤던 무서운 상황들이 떠올랐다. 집에서 쉬겠다는 아빠를 설득해서 차에 태우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인 안동병원으로 갔다. 아빠는 독감으로 진단받았다. 수액을 2시간 더 맞고서야 병원에서 나왔다.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아빠가 이제 독감도 혼자 이길 수 없을 만큼 늙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음달인 2023년 1월 설날에 나는 아이들과 영양으로 갔다. 2년만에 명절을 가족들과 보냈다. 세배도 하고 조카들에게 세뱃돈도 주었다. 엄마,아빠,언니,형부와 12시가 넘도록 고스톱도 쳤다. 아이들팀과 어른팀으로 나누어 윷놀이도 했다. 아빠는 너무 재밌다며 핸드폰을 들고 영상 촬영을 했다. 두달 뒤 아빠의 생일날 다시 가족들을 만나러 영양에 왔고 나의 가족들과 아빠의 생일을 마음껏 축하했다. 나는 다시 예전처럼 부모님의 막내딸로 ‘요량대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