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 버드나무 Nov 21. 2021

04. 레이캬비크에서는 치명적인 실수란 게 없지.

낯선 여행자도 마음 편히 느긋한 곳, 레이캬비크

워크캠프 일정보다 사흘 먼저 도착한 까닭에 오롯이 이틀을 홀로 보냈다. 슬슬 백야가 시작되는 터라 호스텔 창마다 두터운 암막커튼이 쳐 있어 방안에서는 밤낮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머리맡에 알람을 맞추고 잠들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설렘 덕분인지 아침이면 절로 눈이 뜨였다. 북유럽 국가답게 구성은 간소하나 신선한 재료들로 채워진 조식 바에서 야무지게 아침을 챙겨 먹고, 가방 속에 우비와 메모장을 넣고선 숙소를 나섰다. 종일 오락가락 내리는 비도 여행자의 발을 묶어둘 순 없었다.      


레이캬비크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도시라서 어지간한 명소는 모두 도보로 다다를 수 있다. 덕분에 지도 앱을 잘못 봐 목적지를 잠시 지나쳐도, 착오로 들어선 골목에서 길을 좀 헤매더라도 괜찮았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찾던 곳에 이르게 되고, 잘못 접어든 길목에서 오히려 다음번 목적지를 미리 만나기도 했으니까. 실수가 치명적이기 어려운 곳, 잰걸음으로 바쁘게 다닐 필요 없는 곳, 레이캬비크는 낯선 여행자에게도 참 마음 편하고 느긋한 곳이다.      


내가 머무는 호스텔만 해도 1 거리에 총리 관저(Prime Minister’s Office) 여행자 안내센터(Tourist Information) 있었다. 담장이나 외부 보안시설이 없는 총리 관저는 아이슬란드 특유의 개방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엿보이는 곳이고, 여행자 안내센터는 주로 유료 여행상품 판매에 열중하지만 언제나 따뜻한 커피가 마련되어 있어 시내를 오가다 잠시 들러 쉬기 좋은 곳이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총리 관저의 풍경, 사진출처=Guide to Iceland(Matito)

호스텔을 나와 이어지는 오르막 길을 끝까지 오르면 주상절리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한 할그림스키르캬 교회(Hallgrimskirkja)가 나오고, 반대로 내리막길을 끝까지 내려오면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인 하르파 콘서트홀(Harpa Concert Hall and Conference Centre) 방면의 대로와 만난다.     


시내 중심가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한 할그림스키르캬는 아이슬란드 최고층 건축물로서 특유의 외관 덕분에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지만,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나 전망대 뷰로도 유명하다. 대성당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내부는 심플한데, 딱 필요한 기능만 살린 군더더기 없이 디자인이 깔끔하다. 외관의 주상절리 영감을 인테리어에도 반영해 내부 벽면과 기둥, 오르간 파이프, 세례단, 성인상, 심지어 의자에 이르기까지 빙하, 원기둥, 수직적 이미지를 일관되게 살렸다.

주상절리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한 할그림스키르캬 교회의 내외부 모습, 사진출처=Pixabay(좌,중),류(우)

마침 내가 방문한 날엔 건물 한편에서 <Mind the dash between Birth and Death>라는 전시도 진행 중이었는데, 세례와 장례가 이뤄지는 교회라는 공간적 의미 때문인지 참 절묘하게 다가왔다. 아기 배냇 드레스가 담긴 유리 액자는 그저 웃음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축복받던 유아 시절 혹은 미처 성장하지 못하고 박제되어 버린 누군가의 짧은 삶을 떠올리게 하고, 인간의 맨몸 위를 뒤덮은 수많은 문자들은 영화 크레딧처럼 한 인생의 연대기를 상상하게 하며, 리본 포장된 커다란 종이상자는 발송자도 수신자도 없지만 결국엔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받게 될 ‘죽음’이라는 선물을 생각하게 했다.

탄생의 축복과 죽음의 애도가 동시에 이뤄지는 교회라는 장소성 때문일까. 전시 작품들이 유독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류


북대서양 연안을 바라보고 세워진 하르파 콘서트홀 역시 주상절리를 본떠 만들어진 건축물로서 사면이 모두 육각형 철제 프레임의 유리로 뒤덮여 있다. 초기에는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맛이 매력인 레이캬비크의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았다지만, 압도적인 디자인 덕분에 이젠 누가 뭐래도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유리를 투과하는 빛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색이 다채롭게 변하기 때문에 맑은 날과 흐린 날, 낮과 밤의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고, 거울로 된 육각 면체가 빼곡하게 쏟아져 내릴 듯한 천장 디자인도 눈부시게 화려하다. 밖에서 보는 전경보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더 황홀한데, 마치 견고하고 웅장한 벌집 속 같기도 하고 투명하게 시린 얼음 결정체 안에 갇혀버린 것 같기도 하다. 콘서트홀 외에도 컨벤션홀, 레스토랑, 디자인샵이 있어 기념품 구매를 위해 들르기도 하고, 무료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페를란(Perlan)으로 향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기다리기에도 유용했다.      

하르파는 빛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는 모습에 지루해질 틈이 없다. 투명한 얼음결정 안에 갖혀버린 듯한 환상체험 ©류

하르파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7분 정도 걸어가면 선 보야져(Sun Voyager)가 나온다. 레이캬비크시 200주년을 기념해 욘 군나르 아르나손(Jón Gunnar Árnason)이 설계한 스테인리스 조형물로 바이킹 전통 배를 본떠 만들었다는데,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해바라기를 더 닮은 것 같았다. 태양을 조금이라도 더 사냥하고 싶어서 온 몸의 촉수를 힘껏 뻗고 나아가는 생명체의 간절한 열망. 고개를 들어 적적한 시야의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바다를 향해 떠난 항해자의 마음이 된다. 긴 헤맴 끝에 ‘연기 나는 항구’라는 뜻의 이곳 레이캬비크에 첫 발을 디뎠던 정착자(settlement)의 기분이 어땠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선 보야져(Sun Voyager), 미지를 향해 떠나는 용맹스러운 바이킹의 배인가, 귀한 햇빛을 사냥하고자 촉수를 바싹 세운 맹렬한 생명체인가.  ©류


호스텔에서 좌측 방향으로 걷다 보면 아이슬란드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전시관인 컬처 하우스(The Culture House)가, 우측 방향으로 걷다 보면 시민들의 산책코스인 트요르닌 호수(Tjörnin)와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시청사(Reykjavík City Hall)가 나온다. 숙소에서 15분 이내의 도보 거리에 주요 명소가 모두 포진해 있는 셈이다. 그만큼 단조롭고 조밀해서 별 볼거리가 없다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오히려 동네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쏘다닐 수 있어 신이 났다. 이틀만 지나면 익숙한 대학가 뒷골목처럼 금세 눈에 익었다.

     

긴 겨울 끝에 찾아온 반가운 여름맞이로 온 동네가 새 단장이라도 했던 걸까? 들어선 골목의 집집마다 갓 칠한 페인트 색이 선명하니 곱고, 취향대로 맘껏 꾸며 둔 창틀과 대문이 아기자기했다. 어릴 적 스케치북에 한 번씩 그려 본, 상상 속 모든 색과 모양의 집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마치 세상 모두의 드림하우스가 여기서 실현된 된 것만 같다. 250여 년이 넘은 검은색 목재가옥부터 알록달록한 양철 가옥, 제법 두텁고 반듯한 이층 집까지 세월에 따라 변천해 온 건축방식과 개성 넘치는 치장에도 불구하고 유독 창이 많은 특징은 변함이 없다. 최대한 창을 많이 내어 귀한 햇살을 실컷 수집하고픈 아이슬란더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걸까.     

올드 스트리트의 뒷골목에서 마주한 집들은 한결같이 창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햇살을 더 수집하고픈 마음이었을까. ©류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던 보슬비 때문인지 몸에 한기가 들었다.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 길가의 소박해 보이는 식당 <Icelandic streetfood> 들어섰다. 문을 열자 양고기 냄새가  덮친다. 메뉴는 스프   가지, 양고기  혹은 조개 . 아이슬란드는 양고기가 유명하다고 들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메뉴판의 저렴한 가격을 보고 안도했다가, 주문하자마자  내주는 속도에 가웠다가, 플라스틱 일회용 컵에 담겨 나온 수프에 실망했다가, 조심스레  스푼을 입에 흘려 넣곤...감동해버렸다!  '어머머, 이거  이렇게 맛있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호로록 서둘러 먹고 나니 감사하게도 무한리필이 가능하단다. 새로 듬뿍 담아준 조개맛 국물을 한입 삼켰다. '어머,  식당 대체 뭐야?' 진한 꽃게탕 맛이 또한 일품이다.


이틀간 찌푸린 하늘도 쨍하니 해님을 내보이고,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자 몸에 훈기도 돌고, 이내 배가 든든해지자 마음도 한껏 나른해진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행복, 지금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03. 아이슬란드는 당신이 누구든 가리지 않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