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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Oct 27. 2021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나는 행복할까?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을 읽고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숱한 창작물이 꾸준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로 거슬러 갈 수도 있고, 미래로 건너뛸 수도 있는데, 유독 과거로 되돌아가는 사연들이 많고 매번 절절히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감정, 바로 ‘후회’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리라.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되돌아서지 말고 붙잡았더라면’이라는 후회의 감정은 때론 우주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믿기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고 싶을 만큼 절실하고 강렬하니까.    


그러나 후회라는 '인생 속 가정'은 시간을 양분 삼아 쑥쑥 불어나 자칫 생을 짓누르기 십상이다. 담쟁이 넝쿨이 시나브로 줄기를 뻗어 이내 온 벽면을 뒤덮듯이, 시작점에서 조금 삐끗했던 각도가 가다보니 되돌릴 수 없는 격차를 만들듯이, 머릿속 상상에서 발아된 후회는 어느새 두꺼운 굴절 렌즈가 되어 온 시야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때론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과장되고 부풀려져 끝내 남은 생을 잠식해 버리기도 있다. 마치 지금의 불행은 모두 그 선택 때문인 양, 나의 어리석고 경솔한 그 실수 탓인 양 스스로를 책망하다 보면, 다시금 과거에 놓쳐버린 그 선택지는 더욱 미화되고 후회는 더욱 막심해진다. 후회와 불행의 무한 반복이 시작된 셈이다.  


영화 <선리기연>의 명대사처럼 어쩌면 후회는 인간사 가장 큰 고통이자, 이생에서 겪는 지옥 상태일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우리네 조상들이 ‘후회’를 시리고 뼈가 아픈 고통이라 했을까. 그런 점에서 작년에 방영된 jtbc 드라마 <시지프스>가 후회를 되돌리고자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려는 인간들을 '영원히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절묘하다.      


후회의 고통스러움을 시지프스의 영원한 형벌에 비유한 jtbc 드라마 <시지프스>(좌), "인간사 가장 큰 고통은 후회"라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선리기연> (우)


하지만 후회하는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내 삶이 지금보다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 불행이 정말 과거의 그 선택에서 기인한 걸까? 혹시 내 렌즈가 무엇을 보든지 결핍되고 불만스러운 면만 부각해 봤던 건 아닐까? 모든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 어느 배우의 말처럼, 어떤 삶이든 나름의 걱정과 고민, 실망, 상처, 단조로움은 있게 마련이다.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주인공 노라가 평행우주 속 숱하게 다양한 삶의 버전을 모두 경험하면서도 끝내 완벽하게 행복한 인생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K드라마‧영화의 훌륭한 콘텐츠들 속에서 워낙 다양한 타임워프 물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이 소설이 새롭고 신선하지 않다. 도입부터 중반부까지의 흡인력이 약하고, 결론마저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스스로 씌운 후회의 덫을 벗어나 내 삶을 제대로 직시하라고, 놓쳐버린 것들을 계속 아쉬워하느라 남은 생마저 흘려보내지는 말라고, 아까운 기회비용보다는 덕분에 손에 쥐고 남기게 된 것들의 가치를 기억하라고, 지금 곁에 있는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깨달으라고,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니 지금의 내 삶을 긍정하라고, 타인의 시선과 기대가 아닌 진짜 내 삶을 살라고 말하는 작가의 호소가 다소 식상해서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진리는 언제나 조금씩 뻔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지 않았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던 어느 책의 제목처럼, 사실 우린 익히 잘 알면서도 자주 망각하거나 실천하지 못해 어려워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책의 미덕은 삶에 치여 쉬이 잊어버리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금 마음에 되새기게 하고, 스스로 부풀어낸 후회와 불행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하며, 우리네 삶에 잠재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다시금 믿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간혹 마주하는 작은 순간들에 기발한 상상력을 보탠다는 것도 덤으로 얻은 재미이다. 부엌에 들어왔다가 문득 ‘, 내가 여기  왔지?’ 도무지 생각이  난다거나, 퇴근길 집으로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새  앞에 도착해 있다거나, 나는  적이 없는것 같은데 친구가 함께 갔다며 사진을 보여준다거나... 이런 멍하고 당혹스러운 기억의 공백을 만난다면, 당신은  순간 잠시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이동해  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평행우주 속의 수많은 나, 수만 가지 버전의 삶을 체험하는 과정은 불교의 연기설과 윤회를 상기시켜 의외의 깨달음에 다다르게 한다. 어쩌면 이 포도주를 만든 칠레 농장의 주인도, 북극에서 빙하 연구를 하는 학자도, 레코드점에서 악보를 파는 직원도, 쓸쓸하고 외로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도 다른 우주 속의 나 일지 모른다는 상상. 결국 지금 내 눈앞의 낯선 너도 어느 생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이었을지 모른다는 인연법.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면 새삼, 세상을 좀 더 다정하게 대하고 싶어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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