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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W H Apr 03. 2024

중년이 캐스퍼 타면 이상해요?


몇 달 전부터 도로에 굴러다니는 여러 자동차를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자동차를 한 대 더 구매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반떼는 직선을 과감하게 그어 멋스럽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에 접어든 내가 타기에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남들에게 보일 모습이 신경 쓰였습니다. MZ들이 많이 타는 차를 내가 타면 아직 경제적 수준이 살짝 낮아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랜저는 별다른 치장이 없는 것 같은데도 눈을 사로잡는 디자인입니다. 길이가 5미터가 넘을 정도로 크기도 하고요. 내 나이에 타기 부끄럽지 않은 크기와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혼자 출퇴근할 때만 탈 건데 그랜저는 너무 커서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20여 년 전, 내 인생의 첫 차는 현대 아반떼 XD였습니다. 처음으로 차를 갖게 된 게 얼마나 기뻤던지 아예 차에서 자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지금도 내 차와의 첫 만남을 기억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아반떼 XD를 구매한 이유는 제가 가용할 수 있는 돈에서 가장 크고 멋진 그러면서 연비도 좋은 차였기 때문입니다(차종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당연히 젊은 시절의 나보다는 금전적 제약이 적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동차 선택을 못합니다. 20대에는 없었던 또 다른 제약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이입니다. 





사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자동차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브랜드와 차체 크기, 가격이 오너의 경제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20대가 아반떼를 타면 거부감이 없습니다. 누구나 적절하고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어쩌면 오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40대가 아반떼를 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러고 보니 40대라는 나이는 자동차를 구매할 때 신경 쓰이는 게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 중엔 남들 시선도 크게 작용합니다. 저는 이미 패밀리카가 있지만, 오로지 서울 시내 출퇴근에 필요한 차도 그랜저나 프리미엄 브랜드 SUV를 생각합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꺼낸 격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작은 칼은 꺼내기 조금 창피합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위신이나 체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퇴근 왕복 거리 22km, 일주일에 다섯 번 110km, 한 달이면 440km, 1년에 5280km. 내가 앞으로 구매하게 될 차의 주행거리입니다. 아주 짧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세워만 둬도 돈이 나갑니다. 연간 세금과 보험료가 있으니까요. 크고 비싼 차일수록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생각했던 차는 대형 SUV입니다. 시승도 해보고 전시장에 찾아가 견적도 내봤습니다. 몇몇 옵션을 넣으니 찻값이 약 6200만원 정도 합니다. 여기에 취득세 389만원을 더하면 6589만원입니다. 연간 세금은 65만원 정도이고요. 위신과 체면을 위해 1년에 5280km밖에 안 타는 차에 6589만원을 쓰고 매년 65만원의 세금을 낸다고 생각하니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물론 타고 싶은 차를 타는 건 중요합니다. 운전이 그만큼 즐거울 테니까요. 하지만 서울의 출퇴근 시간 도로는 그렇게 즐겁지 않습니다. 비싼 차나 저렴한 차나 모두 똑같이 느린 속도로 달립니다. 이처럼 서울에서의 이동은 차종과 가격을 가리지 않고 평등합니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위신과 체면으로 소비하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꿨습니다. 과시적 소비 대신 합리적인 소비의 관점에서 다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관심 밖에 있던 차가 보입니다. 도로에서 보면 귀엽다고 생각했던 캐스퍼입니다. 사실 경차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들 시선 신경 안 쓰고 출퇴근 할때만 탈 것으로 생각하니 ‘경차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몇몇 경차들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캐스퍼는 우리가 도로에서 만나는 수많은 승용차 중 가장 저렴합니다. 더불어 취득세도 면제되고 연간 세금도 10만원밖에 하지 않습니다. 효율성만 놓고 보면 저에게 가장 부합하는 차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집니다. 체면과 위신을 내려놓고 남들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거든요. 말은 쉽지만 결정하고 행동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년이 경차를 타는 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행복을 위한 과시적 소비가 내게 진정한 행복을 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차를 구매한 순간엔 행복할 겁니다. 하지만 늘 서 있는 자동차, 어느 순간 손에 들린 세금과 보험료 고지서는 그 행복감을 저해시킬 것 같았습니다. 

용기의 첫 단계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겁니다. 캐스퍼는 인터넷으로 판매하니까요.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됩니다. 캐스퍼는 국내 경차 중에서 유일하게 터보 엔진을 얹었습니다. 견적도 내봅니다. 터보를 옵션으로 넣고 가장 높은 인스파이어 트림을 선택하니 1960만원입니다. 내가 갖고 싶었던 차의 3분의 1 가격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특별 기획전에 연말 할인까지 더해 100만원을 할인해 줍니다. 용기가 용솟음칩니다. 

캐스퍼를 타고 출퇴근하는 자신을 떠올려 봅니다. 도로에서 캐스퍼를 볼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남들도 제 차를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할 겁니다.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고, 어느새 결제까지 완료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지 나흘 만에 차가 나왔습니다. 인생 첫차를 구매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즐겁습니다. 잘 다듬어 놓은 조약돌 같은 디자인도 예쁘고, 길이가 4미터도 되지 않는 크기도 귀엽습니다. 실내는 단촐하지만 모든 컨트롤러가 손이 닿기 쉬운 곳에 있고 글씨도 큼지막해서 보기 편합니다.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작은 차에 왜 후방 카메라가 왜 필요할까 싶은데, 쓰다 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비게이션과 연동되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도 있습니다. 터널 앞에선 에어컨이 내기순환으로 자동으로 바뀌고, 과속 카메라 앞에서 속도를 늦춥니다. 가장 높은 트림으로 구매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100마력밖에 안 되는데 잘 달릴 수 있을까?’했는데, 서울 시내를 달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출력이 낮지만 이 차는 그만큼 가볍습니다. 오히려 편한 면이 있습니다. 차가 작으니 운전과 주차가 훨씬 쉽습니다. 다만 그동안 탔던 차들에 비해 실내는 확연히 작습니다. 하지만 큰 상관 없습니다. 나 혼자 타니까요. 물론 넓고 두꺼운 시트를 지닌 큰 차가 더 안락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캐스퍼를 운전하는 게 더 즐겁습니다. 





캐스퍼가 즐거운 이유는 의외성입니다. 내가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작고 귀여운 차를 탈 줄 몰랐으니까요. 가끔 운전하다가 ‘허허’ 웃기도 합니다. 그리고 캐스퍼를 타면 조금은 젊어진 기분도 듭니다. 이 차가 작고 저렴해서가 아닙니다. 작고 저렴한 차를 살 수 있는 용기와 남들 시선에 조금은 초연해진 내 모습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큰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은 우리 중년에게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차를 타는지, 무엇을 입었는지 잘 모릅니다. 남들 시선을 크게 의식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나처럼 캐스퍼가 귀엽다고 생각하셨던 중년이 있다면 조금 용기 내보세요. 우리 중년들도 예쁘고 귀여운 거 좋아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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