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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W H May 28. 2024

자동차의 인상을 결정짓는 그릴 디자인


자동차에 있어 라디에이터 그릴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공기 흡입입니다. 내연기관은 흡입-압축-폭발-배기 행정으로 이루어지는데요. 공기가 없으면 엔진 폭발이 일어나지 않죠. 따라서 전면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엔진으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라디에이터 그릴이 합니다.


다음은 냉각입니다. 엔진 블록 앞에 있는 라디에이터는 열을 흡수한 냉각액을 엔진 쪽으로 보내면서 엔진 열을 식힙니다. 라디에이터가 앞쪽에 있는 이유는 더 신선한 공기로 냉각효과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은 라디에이터 보호입니다. 주행 중 외부 충격으로부터 라디에이터를 보호하기 위해 망(그릴)을 붙이죠. 그래서 ‘라디에이터 그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라디에이터 그릴에는 또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미적 기능이죠. 자동차의 가장 앞부분으로 얼굴을 담당하고 있으니 자동차 외관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라디에이터 그릴은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현대차도 라디에이터 그릴로 많은 디자인적 포인트를 주고 있는데요.
현대차의 역대 모델로 라디에이터 그릴이
어떻게 변화하고 진화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포니는 현대차 역사에서 또렷이 빛나는 기념비적인 모델이죠. 경제성과 실용성 그리고 내구성을 갖춰 국내뿐 아니라 세계 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1970년대는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로 인해 자동차 시장도 경제성이 중시됐습니다. 그래서 라디에이터 그릴의 크기를 줄이고 단순화한 디자인이 유행이었습니다. 포니도 라디에이터 그릴이 작고 각진 걸 볼 수 있죠. 엔진이 작으니 많은 공기 흡입이 필요 없고 라디에이터 그릴 크기를 줄이면 공기저항도 줄여 연비를 높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는 세계 경제가 호황을 맞을 때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중산층이 확대됐고, 승용차가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자동차의 미적 요소도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기가 살아나자 다시 라디에이터 그릴 크기가 더 확대되고 강조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1983년 출시한 현대 스텔라를 보더라도 포니보다 훨씬 커진 라디에이터 그릴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스텔라는 격자형과 세로형 등으로 라디에이터 그릴에 변형을 주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1세대 그랜저는 라디에이터 그릴을 과감하게 강조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세단으로 품격과 품위를 나타내기 위해 전체적으로 직선을 강조한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릴도 직선위주의 단순한 형태입니다.

70~80년대 그릴 디자인의 특징은 헤드램프와 그릴의 크기를 거의 같게 하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당시 출시한 프레스토, 엑셀, 1세대 쏘나타도 모두 직사각형의 헤드램프와 그릴을 취하고 있죠.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동차 제작 기술의 발전으로 차체도 각진 형태가 아닌 곡면을 살린 다양한 형태의 차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릴 디자인에서도 곡선과 각이 혼합된 형태의 그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반면 현대차는 그릴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릴의 크기를 줄이고 헤드램프를 키워 깔끔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세대 쏘나타를 보면 그릴이 아주 작은 것을 볼 수 있죠. 티뷰론은 그릴이 있는지 없는지 약간 모호할 정도의 디자인입니다. 심지어 그릴을 아예 없앤 과감한 디자인도 있었습니다. 바로 1세대 아반떼입니다. 타원형 헤드램프와 볼록한 노즈 캐릭터에 그릴이 방해된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릴을 줄이거나 아예 없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헤드램프를 키워 야간에 더 밝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LED가 없던 당시엔 대신 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시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아 헤드램프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안전을 위해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밀레니엄으로 넘어오면서 자동차의 디자인은 기술적 혁신과 맞물려 큰 변천을 이룹니다. LED 조명 기술의 발전으로 헤드램프를 작게 만들 수 있게 됐으니 자동차의 앞모습 캐릭터는 라디에이터 그릴에 치중하게 됩니다. 크기와 모양이 다양해졌고, 소재와 장식도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현대차는 2000년대부터 현대 디자인 1.0, 2.0으로 ‘모던 프리미엄 디자인’ 철학을 도입합니다. 역동적이면서 감각적인 디자인 언어로 곡선과 직선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스타일이죠.

당시 출시된 현대차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보면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헤드램프 분리형 디자인과 가로형 그릴입니다. 아반떼 HD, NF 쏘나타, 그랜저 TG를 보면 알 수 있죠. 이처럼 현대차는 새로운 디자인 언어와 함께 조금씩 패밀리룩을 만들어갑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 그릴이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자리매김합니다. 여러 자동차 제조사에서 브랜드 특유의 그릴 디자인을 선보이죠.


현대차도 새로운 디자인 언어인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도입합니다. 유동적이고 순환적인 선과 면을 강조하여 자동차의 우아함과 역동적인 느낌을 준 디자인 콘셉트입니다. 그릴에서도 브랜드 통일성을 위해 헥사고날 그릴 디자인을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벨로스터, i30, 쏘나타, 싼타페, 그랜저, 제네시스 등 당시 출시된 대부분의 현대차는 6각형의 헥사고날 그릴을 사용합니다. 새로운 디자인 언어, 새로운 그릴 디자인 형태로 현대차 브랜드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죠. 많은 소비자가 그릴 모양만 봐도 현대차임을 알게 됐으니까요.





2020년대로 오면서 현대차의 디자인 언어는 센슈어스 스포티니스(Sensuous Sportiness)로 바뀝니다. 감성적인 가치를 더욱 높이는 디자인 방향성입니다. 우아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의 조화를 추구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고자 하는데요. 특히 그릴 디자인에서 과감한 터치를 볼 수 있습니다.


현대차 그릴은 역대 가장 커졌습니다. 아반떼와 쏘나타, 투싼 등을 보면 라디에이터 그릴이 헤드램프 영역까지 침범할 정도로 앞모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릴의 형태도 6각형 하단에 곡선으로 변형을 주는 캐스캐이딩 그릴로 변경됐습니다.

그릴을 키우면 차체가 커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대차는 여기에 에지를 강하게 넣은 캐스케이딩 그릴로 과감하면서 구조적인 디자인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죠.






전기차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필요 없습니다. 라디에이터도 없고 공기를 흡입하는 엔진도 없으니까요. 아이오닉 5를 보면 그릴인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앞이 모두 막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적 요소로 그릴과 비슷한 것이 있을 뿐이죠.


사실 라디에이터 그릴은 엔진룸 안에서 와류를 많이 일으킵니다. 공기가 복잡한 엔진룸과 파열을 일으키며 저항을 만들고 과하면 진동과 소음을 유발하죠. 그래서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일정상황 안에서는 그릴에 플립을 달아 엔진룸으로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전기차가 냉각이 완전히 필요 없는 건 아닙니다. 배터리는 충전과 방전을 하면서 열을 발생하니까요. 또 타이어와 브레이크 디스크도 냉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릴을 다 뚫을 만큼의 공기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릴 밑으로 보이지 않게 에어인테이크를 뚫어 배터리 쪽으로 유도하거나, 구조적 디자인으로 에어커튼을 만들어 바퀴 쪽으로 바람을 보내는 정도만으로 충분하죠.





공력성능을 위해서는 그릴을 막는 게 유리하고 또 전기차 세상엔 라디에이터 그릴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그릴이 있던 공간은 막아버리는 디자인이 많이 나올 겁니다. 현대차의 콘셉트카 프로페시아처럼요. 그리고 그 자리는 센서, 카메라, 레이더, 라이더 등 자율주행에 필요한 각종 부품이 자리하게 되겠죠. 이미 많은 전기차가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없어도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큰 캐릭터 역할을 했던, 그리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냈던 그릴이 없어지는 겁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졌으니 디자이너들은 더 많은 시도를 할 수 있게 됐고, 앞으로 우리는 더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지닌 자동차를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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