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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W H Jun 12. 2024

적수가 없다, 그랜저의 성공 방정식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1986년, 한국은 전례 없는 경제 부흥 속에 있었습니다. 이른바 3저 호황의 시대.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로 기업이 경제활동을 하기 좋은 상황이었죠. 수많은 기업이 역대 최대 실적을 냈습니다. 

수많은 회사가 많은 돈을 벌었으니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됐습니다. 임금이 상승하고 근로 환경이 좋아졌죠. 시장에 돈이 많이 풀리면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부자’들도 갑자기 크게 늘어났습니다.

자동차 시장에 부자들을 위한 마케팅 전략이 필요해졌습니다. 당시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었고, 갑자기 많아진 사장님, 회장님 그리고 부동산 부자들을 대상으로 ‘큰 차’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현대차는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 배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했습니다. 바로 1세대 그랜저의 탄생입니다.





1세대(1986-1992)


줄자와 각도기만 가지고 디자인을 한 것 같은 1세대 그랜저는 당시 많은 사람에게 선망과 같은 차였습니다. 군사정권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 것처럼 각이 제대로 잡힌 이 대형 세단은 당시 부와 권력을 쥐고 있던 상류층에게 큰 인기를 얻었죠. 특히 1세대 그랜저는 뒷자리 편의성을 높인 쇼퍼 드리븐으로 출시됐기에 상류층의 취향을 완전히 저격합니다.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앞바퀴굴림입니다.


당시 고급차들은 뒷바퀴굴림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무래도 무게 밸런스에 유리하고 핸들링이 좋으니까요. 하지만 뒷바퀴굴림은 엔진에서 만든 구동을 뒤로 보내기 위한 프로펠러 샤프트가 필연적으로 필요했고, 이는 뒷자리 공간을 좁게 만드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또 구동 시 뒷자리에 소음과 진동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한국은 산이 많고 겨울에 눈도 많이 내리는 지역적 특색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눈길에 약한 뒷바퀴굴림보다는 앞바퀴굴림이 유리한 측면이 있죠.






이렇게 디자인과 크기 그리고 구성에서 1세대 ‘각그랜저’는 부자들의 취향을 저격했고, 아주 비싼 가격이었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랜저=부자’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2세대 (1992-1998)


2세대 그랜저(LX)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술의 발전입니다. 현대자동차의 독자적인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성능과 디자인 그리고 안정성 모든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내죠. 우선 V6 엔진이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2.5, 3.0, 3.5리터까지 총 세 개의 V6 엔진으로 중형 모델과 완벽한 차별화를 꾀합니다.


엔진 외에도 새로운 전자장비들이 대거 등장하죠. 운전 조건에 따라 서스펜션 감쇠력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전자제어 서스펜션(ESC), 바퀴가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는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TCS)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국산차 최초로 에어백이 선보입니다. 운전석과 동반석에 두 개의 에어백을 달아 안정성을 높였죠. 에어백은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엔 굉장히 획기적인 안전 시스템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그랜저는 국내 시장에서 가장 안전한 자동차였고, 소비자들은 크고 안전하면서 멋스러운 그랜저에 더욱 열광합니다. 판매량도 1세대(9만2571대)를 월등히 뛰어넘는 16만4972대를 기록합니다. 2세대 그랜저가 이렇게 많이 팔린 건 그랜저의 상품성이 월등히 높아진 이유도 있지만, 경제 발전에 따라 국민소득이 높아진 이유도 있습니다. 





3세대 (1998-2005)


3세대 그랜저(XG)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젊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그랜저에 대한 수요도 많아졌고, 현대차는 2세대까지 쇼퍼드리븐 성격이었던 그랜저를 오너드리븐 성격으로 바꿉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젊은층에게 어필했고, 안전성과 편의성을 강화하면서 가족 단위 소비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선택지가 됐죠. 가격도 이전보다 다소 낮추면서 더 많은 소비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의 상징이었던 그랜저를 패밀리 세단 성격으로 바꾼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1999년에 등장한 에쿠스입니다. 이전까지 국내 시장에 볼 수 없었던 초대형 세단이 등장하면서 그랜저는 쇼퍼드리븐의 역할을 에쿠스에 넘기고 오너드리븐이 된 거죠.





젊어진 그랜저는 새로운 소비를 창출합니다. 부의 상징이었던 그랜저가 소득수준 향상으로 손에 잡힐 것 같은 거리까지 온 거죠. 특히나 이전엔 전혀 볼 수 없었던 프레임 없는 도어와 고급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젊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3세대 그랜저는 1, 2세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31만1251대가 판매됩니다.




4세대 (2005-2011)


충돌 상황에 따라 에어백의 팽창 속도 및 압력을 자동으로 조절해 탑승자의 안전을 높이는 어드밴스드 에어백, 도어를 열고 시동도 걸 수 있는 스마트키 시스템,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 모두 4세대 그랜저(TG)에서 처음 선보인 첨단기술입니다. 이런 다양한 신기술덕분에 그랜저는 사용성과 편의성이 월등히 좋아졌고 소비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습니다.





4세대 그랜저는 고급차의 이미지를 간직하면서 다양한 소비자층을 만족시키는 모델로 자리매김합니다. 가격 경쟁력도 확보하면서 그랜저가 더 이상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적 이미지를 확립하게 되죠. 그랜저의 대중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세대 그랜저는 무려 40만5755대가 판매됐으니까요.




5세대 (2011-2016)


5세대 그랜저(HG)는 더 젊어졌습니다. 현대차는 그랜저의 메인 소비 타깃을 30~40대로 잡고 디자인을 젊게 만들면서 최신 기술을 대거 선보입니다. 우선 유려하고 세련된 곡선 디자인 '플루이딕 스컬프처'가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넓은 실내공간과 고급스러운 분위기, 인체공학적인 설계에 소비자들이 만족했습니다.


배기량을 줄인 4기통 2.4리터 세타 엔진을 선보였고, 연비를 높인 하이브리드 모델도 그랜저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배기량을 줄이고 연비를 높인 모델은 특히 젊은층에게 인기가 높았고 그랜저가 완벽하게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현대차가 5세대 그랜저를 더욱 젊은 자리에 놓은 이유는 대중적 이미지 확대 이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아슬란입니다. 그랜저가 점점 대중화 되면서 제네시스와의 갭이 너무 넓어졌고 현대차는 그 사이에 위치하는 아슬란을 출시(2014년)합니다.


아슬란은 그랜저보다 정제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 고급 소재로 마감된 실내,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 고성능 엔진 옵션을 제공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그랜저와의 명확한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랜저는 오랜 시간 소비자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끌면서 폭넓은 소비자층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고급스러우면서 친근한 이미지까지 갖춘 그랜저가 준대형 세단 시장의 소비를 빨아들이면서 아슬란은 3년 만에 단종을 맞이합니다.








6세대 (2016-2022)


6세대 그랜저(IG)는 현대차의 기술적 성숙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델로 꼽힙니다. 충돌 위험을 감지했을 때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작동해 사고 위험을 막는 긴급 제동 시스템(AEB)이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더불어 차선 유지 보조, 후측방 경고 등 지능형 전자 안전 기술이 대거 들어간 스마트센스로 운전이 더욱 편하고 안전해졌습니다. 여기에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헤드업 디스플레이 등 첨단 편의장비도 선보입니다.


엔진도 다양해집니다. 2.4, 3.0, 3.3리터 엔진과 함께 하이브리드 모델도 추가되면서 다양한 가격대와 옵션을 통해 많은 소비자가 그랜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젊은층과 중장년까지 폭 넓은 소비층을 형성하면서 그랜저는 드디어 국민차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랜저 IG는 현대차 라인업에서의 큰 변환점이기도 합니다. 그랜저는 현대차의 플래그십으로 출발했지만, 이후 다이너스티, 에쿠스, 제네시스, 아슬란 등 그랜저 상위 모델이 잇달아 출현하면서 애매한 위치에 서기도 했는데요. 그랜저 IG는 현대차의 명실상부한 온전한 플래그십입니다. 판매량도 58만1854대로 역대 그랜저 중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죠.




7세대 (2022-현재)


그랜저가 출시된 지 36년이 지난 2022년. 현대차는 다시 ‘각그랜저’를 세상에 선보였죠. 직선을 많이 사용하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7세대 그랜저(GN7)는 각그랜저의 향수를 자아내고 당시 그랜저의 명성과 권위를 떠오르게 합니다.


'파라메트릭 쥬얼 패턴' 디자인의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 주간주행등과 통합된 날렵한 헤드램프 등 디자인 측면에서 많은 혁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부는 프리미엄 소재와 현대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ccNC), 뒷좌석 리클라이닝으로 편의성에서 큰 발전이 이뤄졌고 더불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최첨단 편의 및 안전사양도 가득합니다.





7세대 그랜저는 최근 25년 형으로 연식 변경되면서 차로 유지 보조 2로 업그레이드됐고, 운전대를 움직일 필요 없이 손만 대고 있어도 자율주행을 지속할 수 있는 직접식 그립 감시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칼럼식 변속기에도 진동 기능이 들어가 N 또는 D에서 R로 이동할 때 진동이 옵니다. 이외에 뒷자리 안전벨트와 트렁크 리드에도 조명을 추가했습니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실사용자들의 편의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업그레이드입니다.




그랜저는 현대차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모델입니다. 일개 모델을 넘어 현대차 역사를 대변하면서 플래그십으로서의 상징성과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죠. 현대차가 고급 세단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경쟁력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각 세대마다 혁신적인 기술과 첨단 사양을 가장 먼저 도입하면서 현대자동차의 기술력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높은 만족도를 제공하며 브랜드 이미지와 소비자 신뢰 구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랜저는 당대 소비자들의 요구사항에 예민하게 대응해온 차종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알아주는 속 깊은 친구처럼 말이죠. 그랜저가 지난 38년 간 쌓아온 영광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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