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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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나이에 견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짧은 인간의 삶, 그보다 더 짧은 우리의 젊음.
되도록이면 이 소중한 시간을 나는 즐거움으로만 채우고 싶다.
하지만, 도대체가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어떤 까닭에 나는 펜을 들기만 하면 고독이 써지는 걸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어떤 까닭에 나는 너를 만나면 상처만 주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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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글이 너무도 달라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내 옹졸함이 망쳐버린 사랑이 그리울 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지르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분할 때, 그래서 온통 미움으로 가득 찰 때,
또는 반대로 내지른 것을 주워 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나의 작은 실수 또는 부주의로 생긴 별일 아닌 일이 겉으로는 쿨한 척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고, 무거워져 갈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지 않고 불안해질 때,
또,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초조할 때,
친구들은 족족 싱글 곡이라도 발표하는데, 난 맨 앞 첫 소절 시작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그리고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던 오래된 트라우마로 또다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토록 내 마음이 굉음으로 요란할 때면 나는 가볍게 차려입고, 포구에서의 그날의 평화로운 감각을 찾아 어두워진 바다 위에 수평선과 나란히 내 몸을 띄운다.
물속에 귀를 처박고 심해의 연주를 들으며, 눈앞에 펼쳐진 별과 달처럼 둥둥둥 떠 있노라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오늘이라는 우주의 축복에만 떠다녀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아차리고, 내 마음이 있어야 할 곳, 제자리를 찾아 금방 다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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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제주여행에서 가장 멋진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라 한다면 나는 그날, 그와의 만남을 회상한다.
늦여름,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시원한 기분 좋은 바람맞으며 바닷길을 따라 목표 없이 걸었다. 괴로운 마음을 비워내려 시작한 배낭여행이 하루 이틀에서 한 달 두 달로 길어지면서 <가벼운 것도 오래 들면 무겁다>라는 사실을 글이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 편도 티켓만 끊고 떠나는 여행의 맛을 알게 되면서 배낭의 무게도 반으로 줄었다. 생명 같은 물 한 통, 옮겨가는 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한 연필 한 자루, 그리고 현악기지만 타악기처럼 연주하는 우쿨렐레가 오늘 여행가방에 든 전부다.
박수기정이 눈에 들어올 즈음 이름 모를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리고 장자의 빈 배처럼 둥둥둥 떠다니는 그를 만났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동거 동락한 듯 보이는 빛바랜 시디플레이어는 주파수가 살짝 어긋 났을 때 들리는 성가신 소리를 더하여 어느 무명 첼로 연주자의 절정 없는 클래식 연주를 바다 위로 둥둥둥 흘려보내고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수평선을 넘어가던 석양은 잠시 턱을 괴고 누워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며 이 안온한 풍경을 나와 반대편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것이었지만,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취소 양해를 구하고 이윽고 난 걸친 옷을 하나씩 벗어던져 팬티 한 장 겨우 몸에 붙인 채 그 풍경 속으로 뛰어들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우리는 포구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나를 제주거지라고 소개했고, 그는 반갑게 포옹하며 자신도 출신 없는 거지라고 화답했다. 우리는 경쟁하지 않고 각자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전설,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고, 공간, 젊음, 로맨스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주제를 가지고 놀았다. 그에게서는 나무와 돌처럼 인간의 삶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곰 삯은 향기가 났다. 그는 편견이 없고, 온통 호기심 어린 경이로운 언어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흥에 취해 발그래 피어오른 부드러운 얼굴은 큼큼 목을 가다듬고서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멋진 곡조 하나를 빼내 들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다시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포구 난간에 섰을 때, 해는 이미 바다 깊숙이 뛰어든 뒤였고, 대신 달이 차올라 바다 위에 둥둥둥 근심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