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어떤 순간은 존재 자체로 사랑이 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감정의 여운이 짙게 남아 서점을 찾았다. 어쩌면 그 감정을 견디기 위해, 혹은 조금 더 곱씹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이 영화가 내 삶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곰곰이 되짚었다.
이 영화를 기다렸다. 원작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글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책을 추천한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도 남달랐다. 단순한 각색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나에게 던지는 감정의 결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었다.
첫 관람은 가볍게 즐길 생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울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정확히 그 지점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재희와 흥수가 서로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을까. 나도 그들과 닮아서, 울음을 삼키려 할수록 숨이 막혀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인지 감정이 차올라도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나를 무너뜨린다. 이 작품이 그랬다. 억지로 눌러 참으려 했지만, 결국 물이 새듯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가장 깊이 울었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흥수가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어머니는 복분자주를 진탕 마시고 화장실에서 토했다. 그 장면은 붉은 액체처럼, 나에게는 마치 피처럼 보였다. 자살을 연상케 했다. 물론 영화에서는 해프닝처럼 지나갔지만, 그 장면 속에서 나는 고통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결국 아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은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그려지지만, 나는 생각했다. 만약 거부감이 없었더라면? 어머니는 술에 취해 그 고통을 씻어내려 했고, 결국 그 모든 과정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증거로만 남지 않았을까? 고통을 준 사람은 자신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꼈다고 해서 어머니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고통은 나에게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나 역시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그 무겁고 끊어지지 않는 감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어머니는 내게 범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기는 꺼내지 마라."는 말 속에서 나는 그 순간의 어두운 공기를 잊을 수 없다. 그 말 이후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뿌리내려, 계속해서 나를 짓눌렀다.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붉은 액체를 쏟아내는 장면을 보며 나는 숨도 못 쉬고 울었다. 만약 어머니가 정말로 자살을 했다면, 흥수는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 탓으로 돌리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관계 속에서 지속된다.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거나 치유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 안에서 계속 얽히며 떠날 줄 모른 채 나를 괴롭혔다. 그 고통은 마치 영화 속에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처럼, 그 자체로 고통이었고, 그 고통은 단순히 나를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느꼈던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남아 있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흥수 어머니가 죽었다면, 그 고통을 탓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의 출처를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실상 고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영화 속에서 흥수가 겪는 갈등은 내 갈등과 같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깊은 아픔과 절망 속에서 결국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을 거치며, 나도 그때의 내가 다시 떠올랐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아픈지, 그 감정을 끊임없이 억누르려 했던 내 경험이 그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부서짐과 강함—유리 파편처럼
이 영화에는 여러 차례 아웃팅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감정의 결이 다르게 전해진다. 나도 아웃팅을 당한 경험이 있다. 유리는 부서지기 쉬운 물질이다.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쉽게 깨어진다. 그래서 나는 금이 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나 한순간의 부주의,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유리는 깨졌다.
하지만 깨진 유리는 더 날카롭다. 작은 조각이 되어버리면, 그 조각들은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쉽게 피부를 파고든다. 나도 그랬다. 부서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산산이 조각났고, 그 조각들은 나를 찔렀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나를 다시 정의했다. 이제는 부서지지 않는다.
상처가 남았고, 그 상처는 여전히 날카로울 때도 있지만, 그 상처들이 나를 보호할 무기가 되기도 한다.
부서짐에만 집중하면, 결국 남는 건 쓰레기뿐. 하지만 그 조각들이 모여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된다.
나는 깨진 유리처럼, 그 부서짐 속에서 강해져 갔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나를 찌를 때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럴 때는 차갑고 시큼 달달한 블루베리를 베어 물며 그 순간을 마비시킨다. 그 맛 속에서 나는 잠시 내 아픔을 잊고, 그 상처를 치유한다.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이 영화가 이성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관계는 단순한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나는 범성애자다. 상대의 성별 같은 외부적 요인과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방식. 영화 뷰티 인사이드 속 사랑과 닮았다. 몸이 바뀌는 상황에서도 사랑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어떤 사랑일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성애 서사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이 영화에서 재희와 흥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연정을 우정과 구분하려 하지만, 어떤 감정은 쉽게 나눌 수 없다. 나는 확신한다. 흥수와 재희의 관계도 분명 사랑이었다. 단순한 이성적 관계가 아니어도, 어떤 순간들은 존재 자체로 사랑이 된다.
나는 보통 영화를 볼 때 장르나 주제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모든 걸 뛰어넘었다. 인위적인 해석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의 감정을 담아냈다. 그렇기에 성소수자로서 이 영화를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나로 사는 것이 약점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나로 살아가야 한다.
사랑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사람은 목적 없이 태어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존재를 인식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연정과 우정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나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흥수와 재희의 관계에서 느껴진다.
정의할 수 없는 순간들.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의 나다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