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우유 때문인지 뉴질랜드 커피는 마셔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맛이 있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어딘가 무르익은 달달함과 부드러움을 음미하게 된다. 커피의 제대로 된 맛을 알게 되고 플랫화이트에 완전히 중독되었다. 늘 아이스커피였던 식사의 마무리는 뜨거운 우유에 섞인 에스프레소의 향긋함으로 대신한다. 홈카페가 부쩍 유행하는 요즘 같은 때, 집에서도 얼마든지 커피를 마셔도 좋지만, 뉴질랜드에 있노라면 전문 바리스타가 내리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 진다. 뉴질랜드 커피도 맛있다며 자신 있게 내세우고 싶은 의향은 가득한데 어째선지 우리 동네에서 마셔본 커피는 번번이 실패를 했다. 더 이상의 실망은 막고자 구글 리뷰를 샅샅이 찾아 제대로 된 커피를 하는 카페를 가기로 했다. 주말마다 요리저리 베스트 커피 찾아 삼만리를 한 결과, 대도시인 오클랜드와 커피 도시라 불리는 웰링턴에 견줄만한 커피 맛집 두 군데를 선정했다.
Excelso Coffee
타우랑가 시티 3번가에 위치한 카페「Excelso coffee」
시티 입구에서부터 쭈욱 직진을 하다 3번가에 좌회전을 해서 경사진 길을 내려오면 작은 커피 간판이 보인다. 주위에는 온통 사업체로 둘러싸여 카페가 있을만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리막길 한쪽에는 인도가 제대로 설비되어 있지 않아서 오가는 차를 잘 살피며 차가 지나갈 때마다 풀 숲에 멈춰 서기를 반복해야 했다. 구글 리뷰가 잘못된 게 아닌지, 단골들의 편파적인 리뷰에 속은 건지 염려되는 마음이 솟구치기 전에 이 작은 표지판이 가리키는 모퉁이를 따라 얼른 들어가 본다.
모퉁이를 돌아 들어서니 표지판처럼 작은 카페가 보였다. 건물 앞에는 카페를 알리는 간판 여러 개가 진열되어 작은 카페의 존재감을 크게 만들었다. 바깥에는 야외 테이블이 단 두 개 밖에 없지만, 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 질서를 지키며 각자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도록 했다. 외부는 가게 문을 닫을 때 사용하는 셔터같이 생긴 철제의 인테리어로 자칫 폐쇄적인 이미지를 줄 뻔했지만, 회색빛과 대조되는 작은 간판들과 화분들이 그 느낌을 배제시켜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문을 여는데 평일엔 네 시까지, 토요일엔 두 시까지 하는 걸 보아 주변 상권의 영향으로 다른 카페들보다 비교적 문을 늦게 닫는 듯하다.
브랜드 좋은 커피 도구를 제쳐두고 테이커웨이 컵 대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머그잔들이 눈에 띈다. 얼마든지 빌려가도 된다는 안내 문구가 함께 쓰여있다. 내가 사장이었다면 단골이 아닌 사람이 와서 머그잔만 빌려가고 다시는 되돌려 받지 못할 상황을 엄습하며 주저할 법한 제도였다. 환경보호를 실천하게끔 유도하는 과감하면서 사소한 행위가 마음에 든다.
내부는 화사함과 따뜻함이 감돌면서 바깥 벽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아쉽게도 바 테이블 하나와 야외와 마찬가지로 작은 테이블 두 개가 끝이어도 여기 카페의 분위기를 전부 누리는 데는 충분한 공간이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여러 손님이 오갔지만 다행히 평일 낮에는 옆 상가 직원들의 테이커 웨이(Takeaway. 포장)가 대부분이라서 자리에 앉는데 기다리거나 눈치 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오래 찾던 부드러운 맛의 플랫화이트. 한 모금 입을 떼는 순간 여러 맛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다 한 가지 맛으로 통일되어 부드럽게 넘겨진다. 라떼아트가 그려진 커피를 받아본 건 얼마만이더라. 유달리 타우랑가에서는 정성스러운 라떼아트를 오히려 하지 않는 게 유행인가 싶을 정도로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이 날 기본적인 아트를 보고도 감격스러웠다. 라떼아트가 예쁘게 잘 나오는 곳이라면, 적어도 커피에 신경을 쓴다는 증거로 삼아도 좋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듯이 커피도 마찬가지다. 매일 방문하는 카페에서 오늘은 어떤 아트를 받게 될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작은 설렘이 모여 행복이 되는 순간이다.
구석에 위치한 카페를 어떻게 알고 오는 건지 아빠와 아이도 와서 커피와 우유 한 잔씩 주문을 했다. 어린아이와 아빠가 카페에서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기분 좋은 낯설음이었다. 그에 질세라 맛있는 커피와 책을 앞에 두고 혼자서도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느껴본 혀의 만족감에 커피를 세 잔이나 더 마신 기분과 같았다.
"맛있는 커피가 당길 때면 여기 Excelso 카페로 와야 한다. 뉴질랜드 카페는 대부분 음식을 같이 하는데 여기는 커피만 담당하며 같이 곁들여서 먹을 음식은 쿠키나 간소한 디저트류가 전부다. 온전히 커피에 집중하는 카페에서 커피 본연의 맛을 느껴보시길!"
Fusion coffee
마운트 망가누이에 위치한 카페 「Fusion coffee」
바쁘고 활기찬 마운트 망가누이 중심에 들어가기 전, 도로 위, 원두 색으로 칠해진 짙은 벽의 카페가 보인다. 바로 옆에 위치한 또 다른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손님들이 제법 앉아있다. 반면, 야외석따위 쿨하게 존재하지 않는 독단적인 카페이자 커피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 보이는 카페였다. 평일에는 7시부터 일찍 열고 세시 반에 일찍 닫는다. 토요일은 평일보다 늦은 시간인 8시 15분에 열고 열두 시 반에 평일보다 이르게 닫는다. 주말 아침에는 커피를 찾는 직장인이 적어서 평소보다 느지막이 오픈을 한다. 오후가 되면 손님들이 많이 올텐 데도 불구하고 서둘러 문을 닫는다. 서비스직이라도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려는 의지가 가득한 이 나라에서 세시 반의 영업 종료 시간은 당연시되는 부분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입구에서부터 커피의 진한 향과 진열된 물건들은 커피 박물관의 느낌을 풍기게 했다. 여기 Fusion 카페도 아침이나 점심메뉴는 취급하지 않지만, 로스팅 카페답게 각양각색의 원두가 포장되어 있었다. 맞은편에는 없을 게 없어 보이는 커피 도구가 개성 있는 한 가지 스타일로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있다. 내부는 널찍한 테이블이 여러 개 있었고 주문하는 곳 뒤로 로스팅을 하는 장소가 눈에 띄었다. 검은색 상의에 높게 묶은 머리는 여느 평범한 복장에 불과하지만 카페 배경 덕에 더욱이 전문적으로 보였다.
영업 종료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간에 도착했지만, 스몰 사이즈의 커피 한잔은 직원의 수고로움을 더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 부랴부랴 방문한 fusion coffee 맛은 아침의 시작을 상쾌하게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테이커웨이라서 집념의 라떼아트는 보지 못했어도 너무 뜨겁지 않은 온도는 우중충한 날씨에도 따뜻함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휘날려 눈앞을 가려도 손에 들린 커피는 요동치지 않았다. 궂은 날씨의 영향에도 여전히 향미로 가득한 커피는 작은 사이즈로 주문한 사실을 아쉽게 했다.
"마운트 망가누이 시티로 직행하기 전에 Fusion coffee 한 번 들려보기를 추천합니다."
카페를 찾은 아빠와 아이 둘 만의 모습은 한국에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오는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다. 육아휴직을 한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오거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가로이 브런치를 즐기기도 한다. 뉴질랜드에서만큼은 카페가 젊은 사람들만의 장소가 아니다.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제공하는 장소의 역할만 해낼 뿐 그 대상은 어디에도 제약이 없다. 누구나 여유를 만끽하는 분위기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기에 뒤섞여본다. 옆 테이블에서 아이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에도 움직임을 멈춰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는 관용을 베풀어본다. 같은 시공간에 있어도 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기억하며 제각기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와 한데 어우러진다. 행복을 누리는 건 사실 그리 큰 게 아니다. 언제든 커피의 향과 맛을 즐기는 시간이 곧 행복이다.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기까지 찰나의 순간이지만 커피가 남기고 간 부드러움을 최대한 음미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