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는 쇼핑 중독이다. 핸드폰 하나면 뭐든 주문할 수 있는 시대에 쇼핑 중독의 위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옷, 물건, 음식, 다양한 취미 활동 클래스까지 그야말로 카드만 내어주면 못 살 것이 없다.
할부로 산 빈티지 지갑. 다행히 잘 쓰고 있다.
물론 조증이 지나도 물건은 남는다. 조증 시기에 산 어떤 물건은 소중한 애장품이 되어 매일같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으며 어떤 물건은 인테리어의 일부가 되어 집을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카드비도 남는다. 그것도 눈덩이가 되어.
지난여름 폭풍과 같은 조증을 떠나보내고 나는 막대한 카드비에 허덕였다. 4개월, 6개월, 10개월... 다양하게 긁어둔 할부는 다달이 내 숨통을 옥죄어 왔다. 칠렐레 팔렐레 사람들을 만나며 냈던 술값은 덤이었다. 한도 300만 원의 카드는 어느새 가득 차 있었고 무직의 내가 더 이상 돈을 빌릴 곳은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던가. 나는 이 난관을 뜻밖의 사건을 통해 해결한다. 한두 달 리볼빙이 쌓이고 신용점수가 차례로 하락하고 있을 무렵 합의금(...)을 받을 일이 생긴 것이다. 피해자가 된 덕분(?)에 카드비를 해결하다니. 그야말로 인생사 새옹지마가 뜨겁게 와닿았다.
일련의 고난을 헤쳐온 뒤 나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비싼 것은 비싼 값을 한다. 자잘하게 산 싸구려 액세서리들은 조증이 지나면 쓰지 않았지만 큰 맘먹고 산 진주 세트는 지금도 잘 쓰고 있다. 둘째, 비싼 것도 정도껏이다. 그렇다. 아무리 잘 쓰게 된 재화라도 정도껏이 필요하다. 일례로 백만 원어치 피부과 시술권을 끊어두곤 시간이 없어 못 가는 호화로운 사치를 부리고 있으니... 구태여 이용하지 않아도 이미 긁은 할부금은 사라지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조증 삽화에서의 쇼핑 중독이 위험한 지점은 '우울증의 나'에게 짐을 지운다는 것이다. 조증이 지나가고 우울증이 찾아오면 그 빚은 고스란히 우울하고 무기력한 내가 떠안게 된다. '우울한 나'는 이제 '돈 없고 우울한 나'가 되어 곱절로 우울한 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쇼핑중독으로 몸살을 앓는 조증 동지들이여. 우리는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까? 손은 제멋대로 움직여 주문과 결제를 누르고 길거리에는 예쁜 옷이 너무 많으며 배우고 싶은 수업도 잔뜩 생겨나는 요 위험천만한 조증 삽화를 무사히 지나는 방법은 없을까?
질러 놓고 몇 번 타지 않은 자전거. 결국 되팔았다.
안타깝게도 정답은 '없다'이다. 카드를 두 동강내어도 핸드폰의 앱카드는 남고 모든 카드를 없애 버리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 모든 쇼핑 앱을 지우고 밖을 나가지 않는 방법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과연 조증의 우리가 그걸 무탈히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스스로 몇 가지 규칙을 정할 수는 있다. 이 규칙은 조증 상태보다는 이성이 남아있는 우울증 상태에서 정하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다. 첫째, 앞서 말한 대로 자잘한 물품들로 10만 원을 넘기지 않는다. 둘째,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은 결제하지 않는다. 셋째,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를 말리라고(!) 미리 부탁해둔다.
이때, 마지막 항목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주로 재화를 구매할 때 지인들의 조언을 구한다. 설사 답정너 같은 마음일지라도 한 번쯤은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거 어때?' '이거 예쁘지?' 따위의 질문을. 평상시 자신이 가장 자주 연락하는 친구, 연인, 가족들에게 조증 상태의 내증상과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자. 그리고 부탁하는 것이다. 나를 좀 말려달라고.
이 방법은 때에 따라 큰 효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주변인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엇이든 사버리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에 새 브레이크를 달아보려는 시도다. 여분의 브레이크가 몇 개쯤 더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자꾸만 고장나버리는 브레이크를 갈고 또 갈아가며 우리는 조증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시 돌아올 조증 삽화를 위해 열심히 빚을 갚고 있는 지금, 나는 부단히 브레이크를 손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