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관 Jan 31. 2022

인간세척기가 필요한 시점

Track5.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한바탕 조증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다소간의 카드비와 새로 사귄 얕은 인연, 무턱대고 시작한 몇 가지 취미 활동들이 남는다. 그리고 나는 돌연 맞닥뜨리는 것이다. 무한한 우울감과 헤어 나올 수 없는 무력감을.

우울한 나는 자주 고양이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내 경우 우울증의 첫 번째 신호는 씻기가 싫어진다는 것이다. 샤워는커녕 세수조차 귀찮아지고 욕실에 들어가는 일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 작은 신호는 재빨리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 중 대부분 씻기를 귀찮아한 적이 있지 않는가? 우울증 환자들이 겪는 가장 큰 혼란 중 하나 또한 이것과 맞닿아있다. 지금의 증상이 우울증 때문인 게 맞을까? 단순히 내가 게으른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기 탓을 하다 보면 우울증은 어느덧 성큼, 그 덩치를 키운 채 우리 잠식한다.


씻기가 싫어지면 나가기도 싫어진다. 우울증이 있다고 이성마저 사라지는 것이 (당연히) 아니므로 내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을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그 누구보다 뚜렷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씻지 않은 나는 자연히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병원, 우체국, 은행, 학원 등 일상적으로 다녀와야 할 곳에 다녀오는 일이 크나큰 미션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할 일은 쌓이고 자책감은 늘어만 간다. 우울증 환자가 천천히 땅굴을 파고들어 가는 과정이다.

때로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안타깝게도 할 일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 어질러진 물건을 치우고 먼지를 닦는 일, 재활용을 내놓거나 쌓인 쓰레기를 버리는 등 집안에도 해야 할 일이 잔뜩이다. 팔다리는 젖은 솜이불처럼 늘어지고 때로 신체화* 증상까지 겪는 우울증 환자에게 이 모든 일은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이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쌓여있는 할 일은 내가 게으른 탓이 아니다. 팔이 부러진 사람에게 청소를 안 한다고 비난하지 않듯 스스로의 병증을 비난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의 무게를 늘리는 대신 하루에 하나씩만 미션을 정하자. '오늘은 하루 두 끼라도 챙겨 먹어야지.' 같이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두 끼가 세끼가 되고 먹는 일이 익숙해지면 또 다른 작은 일 하나를 해치워보는 것이다.


조울증 환자라면 은근슬쩍 조증의 나에게 할 일 중 일부를 떠넘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네 이놈 너 때문에 아직도 빚을 갚고 있다!' 원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숙제를 남기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우리 역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다. 잔뜩 쌓인 일이 숨 쉴 수 없을 만큼 벅차다면 뚝 떼어 미래의 나에게 토스하자. 그리곤 스스로 세뇌하는 것이다. 'X 되는 건 미래의 나지 현재의 내가 아니다'라고. 반쯤은 농담 섞인 이 방법은 마음의 무게를 덜기 위함이다. 당장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긴 시간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의 범위를 정해보자.


추후 다른 글에서 다루겠지만, 타인 또는 주변인에게 SOS를 치는 것도 유용하다. 청소 서비스를 부르거나 가까운 이에게 어려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내 모든 일을 해결해줄 이는 없어도 밥 한술 같이 먹어줄 친구는 나타날지 모른다.


이밖에 내가 애용하는 방법은 '그냥 그대로 있기'다. 게임 캐릭터도 기술을 쓴 다음에는 쿨타임이 있다. 나는 스스로 남들보다 쿨타임이 조금 길뿐임을 인지하고 가만히 있는다. 이때 중요한 건 자책하지 않는 마음이다. 책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도 배워본다. 가만히, 쿨타임을 기다리는 법을.


이 모든 방법을 사용해도 우리는 지난한 우울증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우울증이 이겨내야만 하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고 발칙한 반려 우울증은 매번 다른 증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익히고 익숙해질 뿐이다. 우울증과 함께 살아내는 일에.

매거진의 이전글 이 많은 카드비는 누가 썼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