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관 Feb 11. 2022

번외: 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Track6. 세상 일이 모두 내 뜻대로 될 것만 같았네

가만히 침대에 앉아 이번 달 카드값을 확인하는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 이 아니라 가난한 고시생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나 태어나 처음으로 밥값을 아까워도 해 보고 리볼빙의 늪에서 뒹굴기도 해보고 아무튼간에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과거 조증 상태의 나를 저주하며 다시 다가올 조증에 대비하는 중이다.

알록달록하기라도 해야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무분별한 인간관계와 감당할 수 없는 과소비, 넘치는 에너지를 특징으로 하는 나의 조증은 고시생 신분에 득이 되기도, 실이 되기도 한다. 때로 넘치는 에너지를 공부에다 풀면 더할 나위없이 완벽하지만, 술과 파티 숱한 만남에 맛들이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둘 모두를 겪고 내가 얻은 교훈은 간단하다. 뭐가 됐든 카드를 그만 긁자.


가볍게 말하고 있으나 사실 조증 삽화의 과소비는 우울증 삽화를 악화시킨다. 갚기 힘든 빚과 무기력 속에서 허우적며 스스로를 탓하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쌓여있는 할부와 최소한의 생활비 사이에서 나는 도망칠 수 없다. 그저 묵묵히 답이 없는 금액을 계산하고 고민하고 또다시 고민할 뿐이다.


당겨진 시험 날짜와 더디게 느는 나의 체력, 쌓여 있는 강의들을 마주하면서도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어디서 밥을 먹어야 만원을 넘기지 않을지.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다짐한다. 이날을 추억하는 날이 오게 만들자고. 빽빽한 신림의 거리와 어딘가 침체되어있는 대학동 고시촌을 떠올리면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던 때가 있었노라 자신하는 스스로가 되자고.

부처 예수한테 줄 돈도 없다

훌륭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적당히 나무랄 곳이 있는 아름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더욱 단단해져서 사랑하는 것들을 더 소중히 지키고 싶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믿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어제 본 애니메이션에서 작은 고양이 인형은 말했다. '너의 시간을 살아야 해.' 나는 어쩐지 그 말이 아프게 들렸고 학구열과 맞바꾼 학자금 대출을 떠올렸다. 아깝지 않게 나의 시간을 살아왔다 자신하지만 오늘도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시간 속에 빙긋 웃음 짓는 순간을 심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돈이 없고 마음이 외롭다는 말을 참 길게도 했다. 글만 쓰고 살면 일주일 꼬박 라면을 먹고살아도 좋다고 말하던 아이는 이제 없고 가끔 스테이크도 썰고 파스타도 말고 싶어서 돈 안 되는 문학 따위에서 도망친 고시생이 남았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또 다른 길을 향해 나는 나아가야 한다. 넘치는 빚더미와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다다를 곳은 지금보단 좀 낫겠지. 그런 희망을 품고 오늘도 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작고 소중한 잔고와 '보관님은 비대면 결제 톱클래스예요!'라고 떠드는 얄미운 카드사의 칭찬 사이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세척기가 필요한 시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