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고성이 주는 아름다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을 여행한다면 이동의 거리 때문에 망설여지더라도 꼭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하길 권한다. 독일의 딴 도시와는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난 이 곳에서 특히 폐허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됐다.
역에 내리면 당연히 구도심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된다. 도시를 가로질러가면서 높이 솟은 빌딩과 현대식 건물을 뒤로 하고 가다보면 어느새 고성이 보이는 구도심에 내린다.
숙소 Lotte에 짐을 푸는데 숙소부터가 마음에 쏙 들었다. 공정무역 커피와 유기농 우유를 내놓는 호스텔이 어디 흔할까? 믿음이 가길래 이 집에서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추천받았다.
알려진 스팟이긴 하지만 ‘철학자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보라고 한다. 높은 언덕 위에서 도시의 경관을 감상해보라는 제안이다.
이 산책로는 괴테에서부터 헤겔, 베버, 야스퍼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걸어 올랐던 길이다. 언덕을 오르자 아름다운 자연이 한가득인데 옛 분위기를 간직한 건물들에다 네카어강, 다리가 합해진 전경까지 더해지면서 저절로 아름답다는 탄성이 쏟아졌다. 오덴발트 언덕 위에 우뚝 선 쇠락한 성의 이미지에 눈길을 줬다가 오밀조밀한 구시가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다들 상념에 젖는다. 쇠락한 것과 오늘도 흘러가는 것이 공존하는 게 꼭 우리네 삶 같다.
원래 독일 도시 이름에서 부르그 burg는 성이나 중세 성인의 시신이 안치된 곳을 의미한다. 반면에 베르그 berg는 언덕이나 산을 일컫는다. 하이델베르크에도 쾨니히스툴산과 오덴발트 언덕이 있다. 하이델'베르크'에 왔으니 언덕이라도 올라줘야 한다.
참고로 하임 heim은 작은 동네가 자연스럽게 커진 지역이고, 다리가 유명한 곳엔 부룩 brug이 붙고 온천엔 바덴 Baden이 붙는다. 작은 촌락을 일컫는 도르프 dorf 역시 자주 쓰이는 말들이다.
하이델베르크는 누가 뭐래도 대학도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68년에 만들어졌으니 독일 최초다. 프라하대학 1348년, 빈 대학 1365년 다음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선 세 번째로 세워진 대학이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가 대학도시란 별칭을 갖게 된 게 꼭 오래돼서,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외부인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이미지는 지식을 찾아 고심하는 연구자보다는 젊음, 연애 같은 낭만 쪽에 더 가깝다. 물론 이 대학과 연관돼 노벨상을 받은 이가 57명이 넘으니 조금 오해이긴 하다. 헤겔도 이 대학 출신이고. 그런데 왜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졌을까?
바로 뮤지컬, 연극,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 <황태자의 첫사랑> 때문이다. 옛날 영화라 직접 본 분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drink drink라고 외치는 ‘축배의 노래’는 클립으로라도 본 분들이 있을 듯싶다. 황태자가 여관집 딸을 만나 2년을 사랑하지만 결국 신분 차이 때문에 예정된 이별을 하고 추억을 간직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 속 배경이 된 대학이나 학교 앞 주점 로텐옥센, 고성, 네카어강과 칼 테오도르 다리, 이 모든 배경이 어우러지는 순간 하이델베르크 곳곳은 낭만의 도시로 변한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 중 하나로 나는 고성을 꼽겠다. 붉은 색채의 강렬함으로 우뚝 선 모습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무너진 폐허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묘한 느낌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점은 매우 흥미롭다. 왜 무너진 폐허를 그대로 뒀을까?
사실 고성의 무너진 폐허를 그대로 유지한 속내를 보면 독일인들의 복수심이 한몫을 했다고 보인다. ‘우리 민족의 숙적인 프랑스가 아름다운 고성을 유린해 이렇게 파괴했으니 후손들은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성을 파괴한 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다. 1689년 왕위 계승 전쟁 때 이야기다. 물론 그전에 신교파와 구교파가 벌인 30년 전쟁 중에도 고성은 파괴됐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하이델베르크는 신교의 중심지였고 당연히 전쟁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파괴는 왕위 계승 전쟁 때 이뤄진 게 맞다.
당시 하이델베르크는 팔츠 선제후국이었다. 그런데 선제후가 후계자 없이 숨졌다. 그때 동생의 부인이 선제후의 딸이란 이유로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상속권을 요구했고 이게 전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프랑스군이 독일을 침공한 팔츠 계승 전쟁 얘기다. 그 전쟁 중에 프랑스군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693년엔 성의 화약고를 폭파시켜 불까지 질렀다. 그 후 만하임으로 수도가 바뀐 데다 번개로 인한 화재가 겹치고, 주민들이 무너진 자재를 건축에 쓰면서 성은 더 심각하게 훼손됐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에 성의 ‘보존과 보수’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핵심만 얘기하면 치욕스럽고 지우고 싶은 역사이니 이제 깔끔하게 보수하고 복원하자는 입장과, 아니다. 프랑스의 오만을 기억하고 후세에게 가르치려면 지금 이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 부딪혔다. 그리고 논란 끝에 폐허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이 이뤄졌다. 그리고 나치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민족주의 서사에 정치적 선전 선동까지 결합하면서 하이델베르크는 게르만 민족의 정신을 구현한 땅으로까지 거론됐다.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보면서 지금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떠올릴 이들이 있을까? 치열했던 논쟁이나 상징도 세월 지나 돌아보면 뭐 그리 대단한 문제였던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모두들 자신이 속한 시대의 해석이나 과제를 과거나 유물에 덧입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도 하는 걸까?
하이델베르크의 무너진 성을 돌면서 지금은 차라리 아름다운 폐허의 역설을 느꼈다. 유일한 것엔 늘 강렬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