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만으로 안 될 때
나는 보는 예능이 한정되어 있다.
가끔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어떤 예능을 보는지 올리곤 하는데, <미운우리새끼>는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나 에피소드가 나온다고 할 때만 챙겨보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프로그램도 일부 그런 편이지만 미운 우리 새끼는 특히 출연자들을 신경 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내 니즈에 맞는 케미스트리까지 눈여겨보는데, 김승수와 양정아 그들이 딱 그렇다. 요즘엔 이 두 배우, 이 두 연예인이 같이 나오지 않으면 잘 보지 않는다. 이외에는 김종국, 김종민, 김준호 등의 연예인들이 출연할 때만 시청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다 김 씨다...)
김승수의 '고백' 스토리를 미리 알게 된 건 유튜브에 뜨는 선공개 영상 때문이었다. 진작 기사에서 김준호가 김지민에게 프러포즈한다는 소식도 있던지라 미운 우리 새끼를 언제 보면 되나 기다렸었는데, 연말이라 그런지 소위 '사랑' 가득한 콘텐츠로 <미운우리새끼>를 꾸미며 오랜만에 일요일 오후 9시 20분 SBS를 틀게 만들었다.
지금 시기에 유명인들이 보여주는 중년의 사랑은 30대 이상이나 즐길만한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김승수와 양정아를 10대나 20대가 얼마나 알까? 아마 대부분 모를 것이다. 나조차도 많이 봤다는 기억 하나만으로 그들을 익숙하게 미운우리새끼를 시청하는거니 말이다.
어머니와 나는 이 커플을 평소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사실 몰입이야 됐지만, 응원을 하기에는 '그들이 연기하는 거 아닐까?' '과연 이들의 이해관계가 사랑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갈 수 있을까'라는 의심 때문에 온전히 집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건 예능이지 않는가... 솔직히 대놓고 서로 커플이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진 프로그램이어도 의심할 판이었다.
방송이란 게 보면 알겠지만, 카메라도 최소 10대 정도 있을 것 같은 와중에 위치, 동선, 상황이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과연 진심으로 몰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승수와 양정아 그들은 연기자이지 않는가? 물론 어느 정도 리얼리티 때문에 대본이 최소화되어 있거나 아예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보니 그들에게는 나름 연기와 현실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진심을 다할지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재미는 있었기에 진정성과 연출된 요소 간의 경계에서 어머니와 나는 이 콘텐츠에 어떻게 몰입할 수 있을지 스스로 되뇌며 시청했다.
나는 이번 <미운우리새끼> 스토리를 보며 사랑 앞에서는 나이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언어가 매우 오그라들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달리 따로 설명할 길이 없는 점 양해바란다.
김승수가 양정아에게 고백하기 위해 손지창을 불러 조언을 얻는다든지, 그녀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장면 등 그의 고충과 설렘을 야기하는 갖가지 프레임이 그의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 동안인 것도 한몫하고 말이다. 평소 김승수가 예능에서 보여준 모습만을 봤을 때 그가 용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들이 한순간 한 순간 얼마나 스스로 힘들지도 예상됐다. 15년을 연애하지 않았다면 다시 연애 초보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고백하는 모습을 보니 배울 게 있었다. 오랜 고민이 녹아든 고백이랄까? 그냥 나 너 좋아한다가 아니라 마치 운동으로 치면 점진적 과부하를 하든 천천히 상대방에게 본인이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는지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숨 하나 쉽게 뱉지 않고 경건하게 시청했다. 나는 경험이 없다 보니, 가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가며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긴 했다. 혼자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게 도저히 그냥 눈 뜨고 지켜보기 힘들었다.
그때 양정아가 숨을 쉬어도 되냐는 말을 하는 걸 보고는 생각했다. '아 고백받으면 숨이 잘 안 쉬어지는구나'하고 말이다. 그래서 왜 그런지 찾아봤지만, 결국 못 찾았다. 다음에 진지하게 다시 한번 탐색해봐야 할 듯하다. 어쨌든 빙 두르긴 하지만 충분히 호감을 표하는 김승수의 고백은 양정아에게 제대로 전해진 듯했다. 머리를 정리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그러했다.
예전에 손지창 오연서 부부가 같이 출연했을 당시, 양정아가 자기가 고백하지 않는 이상 김승수가 먼저 고백할 일은 없을 거다는 뉘앙스로 얘기했던 기억이 나는데, 김승수가 이를 해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날이 밝아 보였던 레스토랑 화면에서 갑자기 밤이 되었다. 둘만 시간을 보낼 시간을 충분히 준 뒤에 다시 촬영을 이어가는 건가 싶었다. 이게 진짜 리얼리티라면 그들만의 시간을 줘야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계자는 아니다 보니 그저 추측일 뿐이다. 벤치에 앉는 모습을 보며, 여러 각도의 카메라를 보며 어디 앉을지도 동선을 어떻게 할 건지도 서로 계획을 한 상태로 감정 공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입이 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이내 이걸 가짜로 하기에는 서로에게 너무 공인으로서 이미지 타격이 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끝으로 이런 마음을 접었다. 이 감정들이 다 가짜일 수 있을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감정이 견뎌야 할 무게가 얼마나 클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실 스튜디오에 있는 오윤아와 서장훈이 워낙 몰입을 하는 덕에 단순 연출은 아닐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순 있었다. 특히 그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서장훈은 이전부터 이 커플(?)이 나올 때마다 유독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기 때문이다.
-스포 조심-
차 안에 들어가고 그들만의 시간이 주어진 순간, 이때부터 나는 '이제야 진짜 리얼리티가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스태프들이 없는 카메라만 존재하는 이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의 본성과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카메라만 있는 것과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상황은 꽤나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흘러나오는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는 차 안에서 켠 노래인 줄 몰랐는데, 양정아가 '노래 좋다'라고 하는 걸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가사는 너무도 상황과 잘 어울렸고, 차에서 나오는 두 번의 신호음은 노래와 정적 그리고 두 인물의 감정을 완성시켰다.
양정아의 거절 방식은 김승수의 고백 방식과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본인의 서사와 감정을 차례로 읊었고,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이유를 전했다. 그것은 단순한 거절이라기에는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솔직하게 직조한 대답이었다고 본다. 양정아의 입장이 상당히 이해되면서도 김승수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이 상당했다. 그들이 연기자라는 생각에 이게 방송이라는 생각에 쓸데없는 걱정은 아닌지 그저 방송에 출연자와 시청자 모두 놀아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저게 진짜라면'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내심 연결되지 않을까 했던 나의 희망은 아주 물 건너가버렸다.
둘이 같이 보낸 시간이 있기에 언젠가는 다시 촬영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더 이상 이 둘을 엮을 생각은 하지 않겠다 싶었다. 뭐 다른 방법이 있으면 그거대로 좋지만 말이다. 김승수가 선을 볼 때 양정아의 조언을 받는 식으로 전개해 나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애매한 관계가 지속될 바에 새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실패 속에서 인간적 성장과 성숙함을 경험하듯 다시 시작하는 데 스퍼트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가. 아니면 조선의 사랑꾼 같은 프로그램이 다시 방영할 때 거기서 엮어주는 것도 심현섭의 예시처럼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애초에 미운우리새끼가 주선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니까…
이를 통해 중년의 사랑은 청춘의 사랑과 같지만 다른 결을 갖고 있다는 것이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그렇게 형성한 경험, 상처, 아픔 등이 사랑이라는 한 축을 감싼다. 그들의 이야기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이 사랑을 대할 때에 있어 중년이 사랑을 대할 때에 있어 어떻게 접근하면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에 대한 태도는 매우 신중하고, 그 깊이는 설렘이 감히 파고들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양정아가 연인으로서의 만남을 거절했지만, 그들의 관계가 마냥 닫힌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김승수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배려하는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출연자와 시청자 모두 알아챘을 것이다
좀 더 희망을 가져보자면 이는 김승수에 있어 양정아와의 또 다른 대화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한 채로 다시 한번 다가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미지 출처 : SBS, AI 생성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