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고등학교를 못 간 나는 내가 살던 지역의 공업고등학교 컴퓨터과에 입학하였다. 학교 선택에서나 학과 선택에서 솔직히 내가 뭘 알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막연히 입학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열심히 해 보겠다는 굳은 결심만은 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에 뵙게 된 우리 반 담임선생님께서는 음악 선생님이셨는데, 우리에게 종이를 나눠주시며 고등학교 생활 간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뭔지 적어보라고 하셨다. 종이를 받아들인 나는 글을 작성하기 전 상당한 고민을 하였는데,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중학교 때의 허송세월을 청산하고 이제라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것이 나의 목표였지만 이렇게 작성할 경우 선생님께서 '공부 못해서 실업계 온 놈이 무슨 공부냐?'며 야단을 치시지 않을까 싶어 고민이 되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 욕을 먹을 땐 먹더라도 난 내가 할 말은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작성하여 선생님께 제출하였는데, 다음 날 선생님께서는 나를 염두해서 하신 말씀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담임선생님 : 느그들, 주변 친구들 다 인문계 갔는데 느그는 인문계 못 가서 서럽고 억울 하제? 마, 내도 느그처럼 공고 출신이라 느그 맘 다 안다. 근데, 지금 인문계 간 가들이 잘될지 느그가 잘될지 인생은 모르는 거데이.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라는 말이 있듯이 미래가 두려운 이유는 막연하고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 역시 공부하겠다는 목표는 세웠지만 공부를 왜 하느냐? 공부해서 뭘 할 것이냐? 에 대한 답은 전혀 생각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저 격려 한마디에 나는 나와 같은 처지였던 사람이 성공해서 내 앞에 계신다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런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멋있고 나도 나중에 멋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교사가 되는 법에 대해 상담하고 싶었으나 일단 첫 시험 결과를 잘 받고 난 다음에 여쭤보기로 하였다. 내 말에 설득력을 갖추려면 내 나름대로 뭔가 열심히 했다는 결과치를 보여드려야 상담이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란 사실을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고, 시험 결과 나는 무려 반에서 1등을 하였다. 첫 시험부터 나름 성공적인 결과에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 길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요청하였다.
나 :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담임선생님 : 뭔데?
나 : 제 진로를 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려 합니다.
담임선생님 : 이번에 시험 잘 쳤던데,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그렇게 내신관리를 해서 대학을 가야 돼.
나 : 교사되려면 대학 가야 돼요?
담임선생님 : 그래, 대학 가서 교원자격증을 따야 되는데, 이걸 한마디로 다 이야기해 주긴 힘드니깐 앞으로 자주 진로상담을 하자.
나의 상담 요청에 담임선생님께서는 아주 기쁘게 받아주셨고, 이후 나는 주기적으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였다. 내 입장에선 참 다행스럽게도 3년 내내 같은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게 되었고, 결국 진로 상담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사가 된 후에 어려움이 있을 때도 나는 담임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게 되었고, 그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져 한 번씩 안부인사를 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나를 알아주는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이었으며 담임선생님께서는 막연했던 내 인생설계에 큰 도움을 주신 등대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십수 년이 지난 현재 나는 공업계 특성화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새 학기 첫날 교실에 들어가서 담임선생님과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