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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Apr 17. 2023

장거리 출퇴근

지하철을 2번 갈아타고 지하철앱에 '1시간 14분 소요'라고 나온다면 장거리 출퇴근이라 해도 될 것이다.

오늘로 장거리 근 4주 차에 접어들었다. 오늘 아침에 환승을 하러 걸어가면서 이사 까지 며칠이 남았나 세어 보았다. 환승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아직 한 달 정도는 동행해야 한다.


그동안 출근하기 편한 곳에 살면서 사람이 덜 몰리는 시간대에 퇴근을 하고, 6호선처럼 사람이 적은 호선을 타서 실감을 못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일제히 돈을 벌러 아침부터 집을 나서고 일 끝나면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장거리 출퇴근을 하면 이동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써서 아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곳에 오래 있어야 해서 힘들다. 요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던데 옴짝 달짝 못하고 사람들 틈에 끼여 실려 가기 바쁜 경우도 많다.

하긴 그 와중에 내 얼굴 옆까지 와 있는 휴대폰 게임 화면을 전투적으로 두드려대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나는 한번 두드릴 때마다 돈을 준다면 모를까 서 있기도 힘든 그 상황에서 그렇게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은 생각 전혀 들지 않았다.


며칠 전 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힘들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가 소란해져서 보니 젊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팔다리를 주물러 주라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 사람들이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근처에 있던 여자가 긴급 전화로 상황을 알렸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다행히 남자 깨어났고 일행인 여자의 부축을 받아 다음 역에서 내렸다. 다시 출발하는 전철 창문 너머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장거리 출퇴근이 힘들다 생각한 순간에 쓰러지는 사람을 보게  건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뜻일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몸 상태이긴 하다. 단지 피곤할 뿐.

며칠 전에 받은 비타민을 좀 먹어 봐야겠다.

신기하게 생겼길래 검색해 보니 "비타민계의 에르메스"라고 불리는 독일 비타민이었다. 르메스를 믿어 볼까.

길고 긴 출퇴근의 과정 중에서 좋아하는 짧은 순간이 있다. 전철이 한강을 지날 때 한강 경치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아침에는 생얼처럼 해사하고 예쁜 한강을 볼 수 있고, 늦게 집에 가는 날엔 진한 색조 화장을 한 듯 화려함을 뽐내는 한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환승하러 걸어가는 시간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환승로를 빼곡히 채운 인파가 숨 막히고 싫었는데 다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나태해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매일 아침 잠실역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걸어갈 때마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장애인 연대 시위가 예정되어 있어 열차가 정차하지 않거나 지연될 수 있으며..


이렇게 겁을 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간절히 기도한다. 예를 든 그런 일이 내가 출근하는 시각에 일어나서 지각하는 일은 부디 없기를.


내일도 한강 구경을 하고, 환승 산책을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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