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치 Aug 18. 2024

오렌지 주스

터벅터벅-

아파트 단지 안을 걸어 다니다 104동 앞에 3, 4라인 앞의 현관 앞에 선다. 

굳게 닫힌 유리문은 쉽게 사람을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경비 호출을 누르면 왜 왔는지 설명해야 하고, 남들이 나올 때 몰래 들어가기에는 눈치가 보이는 이상한 시스템이다.  어쨌든 나는 104동 203호의 한 학생 집에 수업하러 왔기에 203호를 호출한다. 몇 초간의 신호음과 탁-하는 소리가 들리고, 굳게 닫힌 유리문이 스르륵 열린다. 


203호 앞에 섰다. 또 문이 있다. 


옆에 검고 작은 네모 안에 그려져 있는 벨 모양을 눌러야 이 문을 뚫고 갈 수 있다. 두근두근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 들어가고 싶지 않은 집이다. 


‘누를까? 아냐, 10초만.’


혼자 고민하다가 10초 동안 숨을 가다듬고 벨을 누른다. 벨을 누르면 바로 문이 열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적당히 높은 목소리를 끼우고, 얼굴에는 미소를 담고서는 현관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대답이 없다. 

아이들이 뒤늦게 뛰어나와 인사를 한다. 엄마는 집에 없니?라고 물으려다가 매번 인사 없는 이 아줌마를 생각하니 묻기에도 짜증이 난다.      


“들어가서 공부하자.”     


이 집에는 두 명의 형제가 수업을 받는다. 4학년과 1학년 남자아이들. 4학년 형은 중학 과정 수학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 반대로 1학년 아이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아이 정도의 수준을 한다. 엄마는 예전에 선생님을 했다나?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를 평가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찌어찌 수업을 마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등장했다.     


“오늘 수업 잘 끝났고요, 첫째는 함수 부분을 조금 어려워해서 다음 주에 복습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아뇨, 복습은 제가 정해요. 그냥 해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둘째 구구단은 가르치시는 거 맞아요? 그거 제가 하는 건가요?”

“아뇨. 제가 하는 거죠. 다음 주부터 할게요.”

“우리 아이들은 제가 채점하고, 많이 틀리면 제가 문자 드려요. 선생님은 진도에나 맞게 교재만 가져다주시면 돼요.”

“네.”     


염병하고 있네.라는 말이 속에서 부글거렸지만 한 달에 3만 8천 원짜리 학습지 선생님이 무슨 권한이 있나 싶어서 "네네."  하고 돌아선다. 딱 3만 원어치 대우를 받는 듯한 기분이 이 집에서 유독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현관문 앞에 서서 인사를 한다.    

  

“그럼 인사.”

“잠시만요~ 선생님 여기 주스요.”


막내가 달라 나와 오렌지 주스를 부끄러워하면서 내 손에 쥐여준다. 


“고마워.”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아이가 주는 오렌지 주스에 조금 마음이 풀린 걸까? 다음 주도 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렌지 주스를 꼭 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중에 엘리베이터에 비춘 내 모습을 보니 스스로가 안쓰러워 보였다. 

이깟 오렌지 주스에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다 내던져버렸다니.

안쓰럽던 자존감을 바닥을 치던 책임감이라는 것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다음 수업을 하게 하였다.     



딩동-

벨을 울리자 702호의 학생 엄마가 뛰어나오면서 애를 부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어머니~”     


다시 밝은 톤의 목소리와 웃는 가면을 장착 후 702호 엄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엄마는 상식은 있는 엄마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오세요~ 바람이 차죠?라고 인사를 받아주었으니 말이다.     


“선생님! 오늘은 무슨 선물 가져왔어요?”

“어…. 선생님이 오늘은 선물을 가져왔을까요? 안 가져왔을까요~?”     


안 가져왔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친해지고자 작은 선물을 몇 번 가져다주면 꼭 저렇게 매번 선물을 주는 거로 생각하고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버릇을 잘못 들인 내 잘못인지, 애초에 애가 물욕이 많은 건지는 모르겠다.     


“들어가서 공부 잘하면 알려줄게~”

“네!”     


힐끗- 나와 아이가 들어간 방문을 닫아주며 아이의 엄마가 나갔다. 자리에 앉아서 애한테 줄 만한 선물이 있나 뒤적거렸다. 아무것도 없다. 전 집에서 받은 오렌지 주스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 다 풀었어요!”

“그래 수고했어.”     


채점해 주고, 틀린 것을 고치게 하고 시간을 확인하자 1분 정도 남겨둔 상황. 2과목 국어, 수학을 하는 702호 아이는 생각보다 말은 많지만, 공부도 잘한다. 그래도 시간을 빨리 끝내면 엄마가 불만을 느낄 게 뻔하니 아이랑 잡담이나 해야겠다.     


“저번 주에 여행 다녀온 건 어땠어? 어디 갔다 왔어?”

“강원도 다녀왔어요! 가서 캠핑했어요, 엄청 엄청 재밌었어요.”

“진짜? 그럼 바다도 봤겠네~? 선생님도 강원도 진짜 좋아하는데~”

“네, 바다도 보고 낚시도 하고, 아빠랑 물놀이도 하고 그랬어요.”     


하나도 안 궁금한데 최대한 반응해 주고, 시간을 보니 대충 1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선생님이 오늘은 선물 이것밖에 없는데, 오렌지 주스 좋아해?”

“네!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휴, 다행이다. 아직 1학년 아이라서 선생님이 주는 선물은 웬만한걸. 다 좋아해 주었다.
오렌지 주스 같은 거 맨날 먹을 텐데... 그래도 심성이 아주 나쁜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어머니~ 수업 끝났어요.”

“엄마! 수업 끝났어! 선생님이 오렌지 주스 줬어!”    

 

702호 엄마가 들어오고 웃으면서 수업 내용을 간결하게 보고했다. 

다행히 엄마는 기분이 좋았는지 감사하다며 별 얘기 없이 수업을 끝냈다. 

오늘의 두 번째 수업까지 마치고 나니 5시 반 타임 학생을 가야 할 차례가 되었다. 


5시 반 수업은 태권도를 다니는 남학생인데 하는 짓이 귀여워서 늘 그 집에 갈 때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작가의 이전글 크리스마스이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