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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Sep 03. 2023

층간 소음의 존재

바도

층간 소음의 존재     


  농담이 아니라, 나는 층간 소음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됐다. 물론 층간 소음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기저기에서 이야기하니까. 때문에 법정도 가고 살인 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어른이 되기까지 ‘아, 이것이 바로 층간 소음이구나'하고 경험할 일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그런 쪽으로는 마음 편하게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다들 놀란다. 어떻게 층간 소음도 한번 느껴보지 못 했냐고. 층간 소음이란 그렇게 누구나 겪는 예사로운 경험인 걸까. 왜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을까. 그렇지만 반대로 소음으로 항의를 받거나 사과를 한 경험은 어른이 된 뒤로도 정말로 많다. 왠지 민망한 말이지만.     


  그러던 차에 층간 소음으로 고통 받고 있는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가게 됐다. 정확하게는 측간과 층간 소음인데, 그가 사는 건물은 벽이 판자처럼 얇아서 옆방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라고 한다. 더군다나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새벽 4시만 넘어가면 삐걱삐걱 스프링 소리가 복도를 울려 댄다고 술자리 내내 불평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몇 번이나 쫓아 올라가서 설득도 해보고 편지를 써봐도 나아지지 않아서, 이러다가 층간 소음으로 본인이 혼절하든 사단을 내든 누군가는 죽겠다 싶더라는 것이다. 두근두근. 남의 불행을 즐거워해서는 안 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의 오랜 궁금증이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에 조금은 설렜다. 그 실체를 나의 두 눈으로, 아니 두 귀로 들을 수 있다니. 조금 과장해서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는 집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어쨌건 나는 하루만 참으면 되니까. 라는 속 편한 생각도 역시 있었다. 우리 집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생각은 안 했겠죠.     


  저녁으로 중식당에서 고량주까지 거나하게 마시고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친구가 하도 ’조용해야 한다‘고 주의를 줘서 후후 호흡도 고르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왔다. 정말 아닌게 아니라 벽이 무척 얇긴 했다. 건너편 집 아이들이 으앙 하고 우는 소리나, 옆집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웅웅대며 바다 울음처럼 흐리게 울렸다. 벨소리에 이어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얼핏 들려온다. 어쩐지 공장으로 견학 온 기분으로 침대에 조용히 앉아서 들려오는 생활의 소음들을 들었다. 솔직히 별로 좋은 소리는 아니다. 상상컨대, 주말을 맞아 느즈러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서 커피나 마시고 뒹굴거리고 싶은데 새벽부터 사방을 두들기고 시끄럽게 굴면 나라도 결국엔 신경증에 걸려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맥주를 홀짝이면서 소근소근 이야기하다가 이불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내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플러그를 꺼내서 귀에 넣곤 이내 잠들어 버린다.


  결국 나는 이 집의 명물인 삐걱삐걱 스프링 소리를, 그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듣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집에 돌아온 뒤로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 집에 별안간 엄청난 ‘층간 소음’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별안간 쿵쿵쿵쿵. 하고 벽이 울린다. 그것은 물론 노크 소리는 아니다. 천장에서 아래 집으로의 방문 의사를 그런 식으로 밝히는 사람은 없다. 이어서 드는 생각은 ‘오 이것은 바로 층간소음이다’라는 것이다. 야릇한 반가움에 친구에게 자랑 비슷한 말도 했다. 너만 있냐. 나도 있다. 신기한 것은 정확히 친구의 집에 다녀온 당일을 기점으로 그것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전에는 빈방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고요했다. 어쩌면 친구 자취방에서 ‘층간 소음 귀신’이라도 등에 붙어 따라온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 망치 소리 비슷한 쿵쿵 소리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마치 뒤통수의 어느 작은 지점을 고무 망치로 톡톡 치는 것처럼 아프지는 않지만 무척 신경쓰인다. 특히나 주말처럼 푹 자고 저절로, 그러니까 알람 소리나 출근 걱정 없이, 일어나고 싶은 그런 날에는 더욱 심해졌다. 물론 단지 그렇게 느껴진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노래나 영화를 틀어 놓아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불규칙한 쿵쿵 소리는 더 기묘하고 선명히 내 귀로 도달해 왔다. 마치 특정 주파수의 소리가 서로 만나 증폭되는 것처럼 그것은 음악 사이사이에, 영화 대사와 대사 사이에 송곳처럼 끼어들어 온다. 마치 행간에 끼어드는 상념처럼 결국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음악과 영화를 몰아낸다. 이걸 어쩌지. 아무래도 집을 옮겨야 하나.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데려온 것은 ‘층간 소음의 귀신’ 같은 게 아니라. ‘층간 소음‘이라는 하나의 존재 개념인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친구의 방 안에서 들려오는 주변 소리에 집중해보고 판독하는 연습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층간 소음’을 구분하는 일종의 감각 센서 같은 것을 열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게 된다. 생각해보니 어느 날 하루아침에 층간 소음 생겨났을리 없다. 그리고 귀신도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다. 그 전에는 내가 단지 층간 소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소설을 보다보면 전에는 좀처럼 와닿지 않던 표현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었더니 마음 깊숙이 스며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층간 소음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스며들어 하나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었다. 동시에 층간 소음으로 폐를 끼쳤던 기억들도 떠올린다. 물론 그때도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새롭게 사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새삼 층간 소음이라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알았으니까. 역시 무언가를 얻게 되면 언제나 무언가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는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꽤나 철학적인 명제다. 아인슈타인이라면 아마도 ‘물론 존재한다’ 라고, 보어라면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라고, 데카르트라면 미간을 찌푸리면서 ‘없다’ 라고 못박아 말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마음 편한대로'라고 대답할 것이다. 유난히 층간 소음이 심한 날이면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날씨를 생각한다. 밖에 폭풍이 불고 뇌성벽력이 몰아치고 있다고 상상한다. 커다란 망치 소리가 쿵쿵대면 불길한 천둥 소리라고 생각해 본다. 삐걱삐걱 대는 소리는 거센 돌풍에 만물이 힘없이 삐걱대는 소리다. 라고 생각해버린다. 이 모든 소음이 끔찍한 날씨 때문이라고 한다면 짜증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을 떠나서 짜증을 낼 대상 자체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층간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도무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면, 나 좋을대로 생각해버리자는 것이다. 태풍이라고 생각하건 층간 소음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건 상관없다. 심지어 달나라 토끼가 떡방아 찢는 소리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 마음만 편하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어설픈 자기 최면이 효과가 있냐고? 솔직히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층간 소음의 원인은 당연히 날씨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거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이라면 ’물론 있다'라고 말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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