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하루
누구든 ‘완벽한 하루’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완벽했어’라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내 지인 중에는 하겐다즈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넷플릭스를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친한 친구들을 모두 불러다가 사치스런 파티를 했던 날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하루하루 업무에 치여 빡빡하게 살고 있다면 ‘짜증 낼 일이 없는 하루’ 라고 간결하게 답하기도 한다. 전에 어딘가에서 영화 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완벽한 하루란 이런 것이다.
‘모닝 섹스, 훌륭한 아침 먹기. 바이크 타러 가기. 돌아와서 수영하기. 점심 섹스. 간결한 점심. 어슬렁 거리기(책도 좀 보고 좋은 영화도 보고). 저녁 섹스. 바에 가서 몇 잔. 친구들 좀 만나고 바이크 타기. 집에 와서 늘어지기. 밤 섹스. 뎃츠 어 프리티 굿 데이(그게 꽤나 근사한 하루죠)’
흐음. 꽤나 그럴싸하다. 키아누에게 인생의 선이란 아무래도 성관계와 오토바이로 귀결되는 모양이다. 사실 키아누 리브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그럴싸하게' 들리기 마련이지만. 키아누가 ‘여러분, 최고의 하루란 말이죠, 느지막히 일어나서 페퍼로니 피자를 시켜서 배 터지게 먹고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들 ‘그럴싸한 의견인걸’ 하고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것이다. 엄청난 설득력이다. 왠지 이병헌이라면 완벽한 하루란 ’롤스로이스 뒷자석에서 충실히 대본을 숙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 같다. 지디에게 ‘완벽한 하루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물어보면 ’지루한 건 싫어, 완벽은 더 싫어'뭐 이런 대답을 하지 않을까. 당연히 농담입니다.
나 같은 경우 완벽한 하루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이스 커피를 들고 한적한 해변으로 나간다. 느긋하게 아침 수영을 즐기고 모래밭에 뒹굴뒹굴. 시시한 소설 따위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들어와서 샤워 후 잠깐 낮잠. 테라스가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맥주를 한 잔 마시고 글을 쓴다. 다시 바다로 쏙 들어간다. 어푸어푸. 저녁까지 놀다가. 불을 피워서 소고기를 구워 먹고 위스키를 마신다. 불장난을 하다가 돌아와서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쿨쿨 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생활을 최소 사나흘 정도는 반복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에 정확히 말해서 ‘완벽한 하루’라기 보다는 ‘완벽한 생활 패턴’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말하자면 ‘완벽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나는 매년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름 휴가가 다가오면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쩝쩝 입맛을 다시며 바닷가로 떠날 기회를 노린다. 6월 초라서 아직 이른감이 없지 않지만, 역시 이번 연휴에도 나는 동해로 떠났다. 두근두근. 마침 기상청에서도 ‘완연한 여름 기온일 예정이니 이른 더위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조심은 무슨. 나는 당장 민소매와 수영복을 꺼내 양양으로 출발했다. 점심대가 지나 해변에 도착했는데 어쩐지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살짝 발을 담궈 봤더니 그야말로 얼음장처럼 차갑다. 아마도 바닷물이 아직 겨울의 냉기를 품고 있는 데다가, 난류가 흘러 들어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시린 바다에 몸을 담구고 첨벙첨벙 물놀이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는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4시간이나 운전해서 동해까지 갔다가 고작 ‘발만 담구고 왔다’라는 굴욕적인 사태는 막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그날 저녁부터 으슬으슬 몸이 떨리더니,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방으로 돌아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괜찮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아침 댓바람부터 바다에 다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렸다. 뇌가 녹았다가 굳었다가 하는 것처럼 울렁울렁 거리고 순식간에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도 잃었다. 며칠째 해열제를 먹어봐도 좀체 나아질 기미가 조금도 없다. 역시 완벽한 하루를 보내기란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내가 바다에서 덜덜 떨며 수영을 하고 있을 때,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그녀는 평상복(카라티에 면바지)을 입은 채 거침없이 바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해수욕을 하려나 싶었는데 허벅지 깊이까지 들어가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간 바닷속을 주시하더니 ’휙‘하고 무언가를 낚아챘다. 그것은 바로 미역 줄기. 무심히 보던 나는 그 흥미로운 광경을 대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체 아주머니는 뭘 하고 있는 걸까. 곧이어 그녀는 해변에 떠내려 온 미역들을 모조리 훑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신나고 보람찬 표정과 몸짓으로, 바다를 동에서 서로 가로 지르며. 처음에는 ’혹시 이 지역을 관리하는 청소부인가'싶었지만, 모래 사장에 앉아 있는 일행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나 사진 좀 찍어줘!'하며 미역을 들고 포즈까지 취하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단지 ’미역‘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아주머니일 뿐인 걸까. 나는 이미 수영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추위를 타지도 않는 건지 아니면 추위 따위는 잊을 만큼 미역이 그렇게나 좋은건지 온 해변을 뒤집으며 미역을 수집하고 있었다. 수집한 미역들은 일행이 앉아있는 돗자리 옆에 무더기무더기로 쌓아 놓았다. 필시 그 ’미역 아주머니‘는 미역과 무슨 깊은 인연이 있는 분이 아닐까. 죽은 미역으로는 국도 못 끓일텐데. 집 전체를 바다 미역으로 멋지게 장식하려는 계획을 세운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 집으로 돌아와 나는 앓기 시작했다. 헤롱헤롱 독한 감기약에 취해 침대에 늘어져 있으려니, 내 몸 전체가 마치 건져진 미역이라도 된 듯 흐물흐물 무기력해졌다. 그 미역들은 대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곰곰 ‘미역 아주머니’를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오호, 과연 그럴지도 몰라!’ 하는 가설이 반짝 떠올랐다. 옛날, 귀여운 꼬마 시절 아주머니는 여름 방학을 맞아 동해 바닷가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해변에 돗자리를 피고 누워서 챙겨온 수박도 먹어가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아가, 맛있는 것 준비하고 있을테니 바다에 가서 멱감고 놀으렴~’ 하고 말한 것이다. 그때 꼬마는 ‘멱감다’라는 생소한 말을 ‘미역 감다’로 착각하고는 ‘아하, 바다에서는 원래 미역을 감고 노는구나’ 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 순간부터 아주머니의 미역 사랑은 운명처럼 시작되었다. 어릴적 바다에 뛰어들어 미끌미끌한 미역을 온몸에 휘감고 행복하게 놀던 것이 습관이 되어, 중년 여성이 된 지금도 바다만 오면 룰루랄라 미역을 수집하며 놀게 된 것은 아닐까. 내가 매년 해수욕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주머니는 미역을 몸에 감을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행들도 미역을 채집하는 모습에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던 것을 보면 ’쟤는 아직도 저렇게 미역을 감고 논다니까. 호호'하면서 과거를 추억하며 훈훈하고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서야 모든 퍼즐이 착착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군. 헤롱헤롱. 이렇게 절여진 미역처럼 몽롱하게 누워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든다. 살면서 무언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설령 그것이 고작 미역 채집일 뿐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