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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May 31. 2024

나는 독일인입니다.

노라 크루크의 그래픽노블『나는 독일인입니다』을 읽고

 그래픽노블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독일 출생 작가 노라 크루크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과 이모가 나치 정권 시절에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따라가는 책입니다. 비극적인 역사와 그 시간을 살아낸 한 가족의 역사, 그 역사를 물려받는 이들의 삶과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책은 작가가 처음 뉴욕으로 유학을 갔을 때 겪었던 일화로 시작합니다. 친구 아파트 건물 루프탑에 있을 때,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한 노부인이 어디서 왔는지 물어봤고, 작가는 독일에서 왔다고 독일에 가보신 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노부인은 오래전에 독일에 있었다고 말하면서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사연을, 가스실에서 열여섯 번이나 살아남은 사연을 들려줍니다. 순간 작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뱃속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뱃속 뜨거움은 작가에게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워 집에 돌아와 웃옷 소매에 ‘유대인’이라고 쓴 노란 별을 꿰매 붙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십 대 시절 외국 여행할 때,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이모의 충고를 무시하고 독일인임을 밝혔는데, 주변 현지인들이 ‘하일 히틀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책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그 순간 작가의 뱃속 깊은 곳은 뜨겁지 않았을까요? 작가의 뱃속은 얼마나 자주 뜨거워졌을까요?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부르르 떨었을까요? 그래서인지 뉴욕에 사는 작가는 말할 때 독일 억양을 숨기려고 하고, 최대한 입을 가리고 대답을 짧게 한다고 합니다. 요가 수업을 받을 때에는 오른팔을 비스듬하게 쭉 펴서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할 때 망설이는데, 히틀러 경례가 생각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 소설, 다큐, 책 등을 적지 않게 봤지만, 거의 대부분 유대인의 시선과 마음으로 그려진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일인 작가가 유대인의 아픔 앞에서 뱃속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낀다는 이야기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독일이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독일인 한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뱃속 뜨거움을 느끼는 작가가 멋져 보였습니다.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반성하는 일이 당연한 것이지 뭐가 멋있냐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칭찬할 필요 없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당연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방귀 뀐 놈이 오히려 성낸다고, 잘못한 이들은 핑계 대고, 변명하고, 속이고, 감추고, 남 탓하고, 고래고래 소리치기 바쁩니다. 작가는 그리고 독일인들은 어떻게 이 뱃속 깊은 뜨거움을 느끼며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까요? 교육의 입니다. 1977년생인 작가는 ‘아우슈비츠 교육’이라고 불리는 과거청산 교육을 받은 최초 세대입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독일인들은 뱃속 깊은 뜨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느꼈습니다. 독일의 교육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교육만 문제일까요? 독일의 교육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 교육이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반쪽짜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총리를 비롯한 국가 지도자부터 머리를 숙여 용서를 구했습니다. 말로만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열어서 잘못한 이들을 정확하게 처벌을 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교육의 내용들이 일상에서 거의 다르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적어도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당연한 일을 일상에서 행하는 어른들이 적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교실 밖 교육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5년 뒤에는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역사와 과거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그래픽노블 『나는 한국인입니다』가 출판되길 기대해 봅니다. 이를 위해서 저부터 당연한 일을 하는 당연하게 해내는 조금은 칭찬받을 만한 어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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