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침묵의 미래
김애란 작가의 ‘침묵의 미래’에서는 언어의 힘을 다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작품의 화자가 언어, 말,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두 가지 주제로 작품을 분석했다. 언어의 의미와 작품의 기술적인 부분이 그것이다.
민족의 개념은 동일한 문화, 신화, 역사 그리고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이야기가 형성되고 이것을 말로 글로 전하며 문화가 생겨난다. 이러한 문화는 해당 공동체만의 고유한 특성을 만들어 내고 이것은 곧 소위 말하는 ‘어떤 국가스러움’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한국스러움, 과 같은 단어는 자칫 잘못하면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있어 나는 이 단어의 사용을 지양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자신이 한국인임을 상기하는 지점을 발견하고 민족성을 갖는다.
동일한 언어의 사용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여주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다. ‘침묵의 미래’에서도 아주 잠시지만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언어는 딱 하나,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추측하건대 박물관에 전시된 사람들은 ‘대화’를 거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작품 내에서 중앙 언어를 아예 모르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정당한 계약을 하고 왔다고는 하지만 화자(말)를 사용했던 노인은 납치되듯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중앙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전시된 사람들을 납치하듯 연행해 왔을 확률이 높고, 중앙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중앙 언어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당연히 대화는 단절되었을 것이고 전시된 사람들은 고국의 언어에 깊은 향수를 느꼈을 것이다.
노인이 종국에는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며 죽지만 그것을 듣고 대꾸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받아들인다. 외국 관광지에서 우연히 한국인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한국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해외여행 중에 곧잘 저지르곤 한다.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말을 걸고 통성명을 한다거나, 더 나아가 식사를 함께 하고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일행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 말로 이야기할 일이 없는 낯선 국가의 관광지에서 우리 말로 무언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한평생을 말이 통하는 사람 없이 살아간 고독과 좌절감을 감히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노인이 죽어가면서도 고향에 찾아가 그곳에서 고국의 언어로 대답해 줄 사람을 간절히 찾는 것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작품을 창작할 때 진술보다는 묘사에 집중하라고 배운다. 물론 묘사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창작하기 힘들고, 진술과 적절히 혼용된 작품이 바람직한 작품이다. 그러나 묘사로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을 한두 문장의 진술로 표현하면, 작품에 대한 흥미와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침묵의 미래’의 화자가 언어라는 것을 알고 읽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읽기 전부터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자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않고 읽었다면 받았을 충격 같은 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나는 화자가 언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은 부분이 진술로 쓰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작문 실력 부족으로 인해 생겨난 편협한 사고에서 기인한 내 착오였다.
작품을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부분은 소수언어박물관에 대한 묘사다. 과거에 ‘침묵의 미래’를 읽고 소수언어박물관이 실존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특히 책에서 자세히 묘사된 언어가 떠다니는 분수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나는 그 부분을 여러 번 읽으면서 어떤 모습의 분수일지를 상상했다. 그것은 조금 황홀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관람객들이 그 분수를 가장 좋아하는 것이 공감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에 ‘침묵의 미래’를 검색하면 누군가 소수언어박물관이 실존하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게시글이 나온다. 무덤덤하게 ‘검색해서 나오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라는 답변이 달려있다. 수업 중에도 교수님께서 비슷한 사례를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 나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묘사에 대해서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인지 아닌지가 헷갈렸던 것 같다. 그 정도로 김애란은 소수언어박물관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많은 투자를 했고 ‘정말 실존할 것만 같은’ 장소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언어는 어떤 기능을 가질까. 언어는 공동체의 단합을 도모하고 구성원의 소속감을 형성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 그 사회의 부조리함, 그 부조리함과 싸우는 사람들. 언어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한다. 그리고 문학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알리는 방법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갈수록 내가 좋은 작가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의 ‘미음’ 자도 몰랐던 제작년과는 달리 ‘미음’의 한 획 정도는 그을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어떤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해야 할까. 우리의 언어가 멸종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