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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의 자유비행 Sep 30. 2021

[시에서 질문하기] 1. 카멜레온이 카멜레온일 확률

박세미, 몇 퍼 센트입니까

  내가 나일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박세미 시인의 「몇 퍼 센트입니까」의 화자는 “내가 나일 확률”이 얼마인지 계속 묻는다. ‘나’는 계속해서 뜀틀을 넘는다. “누군가는 동물이” 되고 “보호색”을 띤다. 카멜레온이 된 걸까? 상황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 색을 바꾸는 동물이 된 걸까? 그렇다면 내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보호색을 갖게 된다면 더는 내가 아니게 되는 걸까?

  누군가는 동물이 되겠지만, ‘나’는 동물 될 수 없다. 그저 계속해서 뜀틀을 넘는다. 뜀틀을 넘으면 또 다음 뜀틀이 기다리고 있다. 넘어도 넘어도 뜀틀은 계속 등장한다. ‘나’는 내가 되기 위해, 내가 나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뜀틀을 넘는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뜀틀과 넘어진다”.     




  무수히 많은 자아, 페르소나는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그중에서 ‘나’를 고르라면? 나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 무수히 많은 자아는 언젠가 소멸할 수 있고 언젠가 다시 생겨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그렇다면 미래에 소멸할 자아 A를 ‘나’라고 지정할 수 있을까? A가 100%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 B는? 미래에 생겨날 또 다른 자아 C는? 그것들은 모두 ‘나’인가, 아니면 ‘나’가 아닌가.

  인간은 육체보다 정신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다. 아무리 건강한 신체를 지녔더라도 정신이 병들면 곧 신체도 병든다. 가장 무서운 것이 마음에 병이고, 다르게 말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이다.

  내가 나일 확률은 1%다. 내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라는 그 사실 자체다. 나머지 99%는 나의 정신이다. 카멜레온이라는 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1%다. 나머지 99%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보호색을 결정하는 카멜레온의 정신이 차지한다.

  내가 나일 확률이 1%라는 것은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재정의할 수 있는 확률’이 99%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카멜레온도) 99%의 확률로 계속 변화한다.

  내가 나일 확률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뜀틀을 넘을 수 있는 존재인지 의심하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늘어선 뜀틀을 어떻게 넘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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