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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 Apr 18. 2024

수중에 현금 없는 어른이 되었다.

응답하라 유스호스텔

 20여 년 전의 일이다.

대학 시절 여행 동아리인 유스호스텔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때 했던 여행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바로 설악산 산행이다. 


 여행을 기획하는 리더 한 명이 여행 스케줄을 동방 게시판에 붙여놓으면 맘에 드는 여행지를 선택한 후 출발한다. 날씨 좋은 주말엔 전국 각지로 출발하는 여행 팀들이 있다. 인기가 많은 여행지에는 인원이 몰리기도 한다. 설악산 여행은 참가 인원이 꽤 많았다. 인원이 적을 때는 두 세명만 갈 수도 있고 인기가 많을 때는 한 팀에 열명을 넘기기도 한다. 많이 참가할수록 여행이 더욱 재미있다. 이번엔 많은 인원이 함께 하는 여행이라 기대가 되었다.

 

 여행 동아리에서의 여행이란 50리터짜리 배낭을 짊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배낭의 무게도 해당되지만 책임감도 포함된다. 여행 기획부터 잠자리, 식사등 전부 학생들끼리 해결한다.  텐트, 침낭, 버너, 코펠 각종 식재료를 챙겨 함께 떠나는 일행들끼리 나눠 메고 여행을 한다. 여행의 끝이 다가올수록 내 배낭의 무게도 가벼워진다.

50리터짜리 배낭의 느낌이란 쪼그려 앉은자리에서 배낭을 메면 무게 때문에 몸이 뒤로 넘어가게 되는 수준을 말한다. 혹은 혼자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무게가 상당하다.

한때 유행했던 국토대장정과 흡사하다. 걷고 또 걷는다. 국토대장정의 짧은 버전이랄까.


 그런데 난 동아리에서 가는 산행은 처음이다. 강이나 바다로 떠나는 여행만 경험하였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는 산행이 어떨지 조금 걱정되었다.


 백담사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백담사에 도착한 시간은 밤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반딧불이가 반짝이며 우리를 호위해 주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느라 반딧불이를 본 게 처음이었다. 인상적이었다.

 백담사에서 자고 다음날 대청봉을 향해 올랐다. 대피소에서 1박 후 하산하는 스케줄이다. 역시 설악산은 설악산이었다. 힘들었다. 평지 걸을 때보다 몇 배로 더 힘들었다. 깔닥 고개를 넘느라 주위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땅만 바라보며 올랐다. 흙, 돌, 나무뿌리, 앞 친구의 발끝! 게다가 해 지기 전에 대피소까지 도착해야 한다.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안 된다. 다른 일행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젖 먹던 힘을 다해 올랐다.


 대피소에 도착 후 부랴부랴 저녁을 해 먹고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대피소는 9시가 소등시간인데 더 일찍 소등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들 피곤해 코 고는 소리가 엄청났다고 한다. 난 전혀 몰랐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었다. 세상이 내 발 밑에 있었다. 운해였다. 운해라는 이름 그대로 구름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고 구름 아래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신선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토록 멋진 풍경은 처음이다.

 하산하는 길은 즐거웠다. 산을 다 내려왔는데, 어느 중년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요새 말로 '노지캠핑' 하는 우리를 대견해하셨다. 그리곤 우리의 젊음을 응원하며 여행에 보태 쓰라며 '5만 원'을 건네주셨다. 당시 5만 원이라는 돈의 가치는 지금보다 큰 데다가 우리가 이 여행을 하기 위해 1인당 지불하는 여행경비가 5만 원 정도였다.


너무 감사했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일정인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런데 도착한 바다에 우리 학교 버스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온 이들도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는데, 행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 중에 버스 멤버와 아는 이가 있었고, 마침 빈좌석이 있어 학교까지 태워주었다. 이렇게 집에 가는 교통비도 아끼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 도착한 후 여윳돈으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일정을 하루 더 늘려, 학교에서 텐트를 치고 자기로 했다. 소중한 하루가 추가되었다.


 내가 참가한 여행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였고, 처음으로 운해를 본 경험, 중년부부의 감사한 마음 씀씀이. 귀갓길의 행운까지 맞물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 여행을 마친 후 나는 오래도록 이 부부의 선행을 곱씹어 보았다. 나 역시 그들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전의 우리처럼 여행을 즐기는 대학생들을 만난다면, 보태 쓰라며 돈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첫째. 나는 그 부부처럼 모르는 일행에게 선뜻 말을 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사교적이지 못하다. 그래도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학생들을 보면 옛 추억이 떠올라 반가울 것 같다. 말을 걸 용기를 내 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둘째. 여태 나는 여행하는 학생들을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의 행동반경이란 게 험지가 아닌 유명 관광지만 가기 때문일까? 요즘엔 학생들이 배낭여행을 안 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셋째.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내 수중엔 현금이 없다. 카드만 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지갑도 없이 핸드폰에 카드 한 장만 달랑 넣고 다닌다. 만약 여행하는 학생들을 만난다면

먼저 사교성을 장착하고 다가가 말을 건다.

그 뒤에 번호를 따 계좌로 송금한다?!!

아! 낭만이 없다!


  나는 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 중년부부를 20년이 넘도록 추억한다. 나도 어린 학생들에게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 앞으로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그때 선뜻 돈을 건네줄 수 있게 수중에 현금을 챙기고 싶다. 만약 학생들이 사양한다고 해도 현금이라면 주머니에 찔러 주며 건네는 맛이 있지 않겠는가. 마치 현금이 '그들과의 만남을 기원하는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인양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


그렇게 그들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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