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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Apr 07. 2024

달콤한 인생

주 영

"띠-띠-띠"

전자레인지가 초콜릿을 녹이는 임무를 완수하였음을 알리는 소리다.

"달칵,  탁."

 녹진하게 녹은 초콜릿이 담긴 그릇을 꺼내 상태를 살펴본다. 진한 고동색을 띄고 걸쭉한 농도가 되었으면 미리 랩핑을 해둔 평평한 용기에다가 붓는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꼼꼼하게 랩핑을 하고 뚜껑을 닫아 냉동실에 보관한다. 시간은 어느새 밤 8시, 하늘 가운데에 달이 휘영청 떴다. 나는 지금 어두운 주방에서 파베초콜릿을 만들고 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일종의 연례 행사로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왔다. 이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초콜릿을 광적으로 사랑해온 나에게 있어 흠모하는 신에게 바치는 성체를 만드는 것과 같이 엄숙하고 거룩한 작업이다. 내 생의 모든 순간에 초콜릿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더운 여름에 학교가 끝나면 슈퍼에서 사먹었던 빠삐꼬 쭈쭈바, 공부하다 집중이 안 될 때마다 친구들과 쪼개 먹었던 자유시간, 내가 우울할 때마다 엄마가 사들고 왔던 칙촉과 초코파이, 첫사랑에 슬퍼할 때마다 먹었던 크런키초콜릿, 대학교에서 자주 사먹었던(그러나 친구들이 질색했던) 봄봄 폭탄초코.. 그래서 한 때 ‘내 혈관에는 피 대신 초콜릿이 흐르는 게 아닐까? 나는 사실 알고보니 윌리 웡카의 숨겨진 자손이며, 곧 초콜릿공장을 물려받을 유전자를 타고 난게 아닐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영화 찰리와 초콜릿공장을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말만 거창할 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실상은 흔한 오븐이나 거품기 같은 장비도 없이 유투브에서 보고 만드는 주영의 우당탕당 손쉬운 파베초콜릿 만들기이다.

 냉동실에서 5시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버텨내고 꽁꽁 언 용기를 꺼낸다. 초콜릿도 꽝꽝 얼었을 것 같지만 신비하게도 겉은 딱딱하고 속은 말랑하다. 기온이 내려가면 모든 것이 빈틈없이 언다는 일반적인 과학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다. 매년 나는 이 때 경탄의 시간을 갖는다. 영하의 온도에서도 어떻게 꾸덕하고 쫀득한 자신의 성질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누군가가 이를 두고 우유의 유지방 덕분에 부드럽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직도 이 초콜릿의 진짜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경탄에 오래 젖을 새도 없이 나는 바로 도마와 칼의 표면에 무가당 코코아 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초콜릿을 모셔 신중하게, 그러나 빠르게 네모로 자잘하게 썰어낸다. 이도 시간이 지나면 녹으므로 속도가 생명이다. 사각형으로 자른 초콜릿을 다시 코코아가루로 군데군데 묻히면 주영판 못난이 파베초콜릿이 완성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점이 있는데, 바로 물이 반드시 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초콜릿 조제 과정에서 물은 상극이다. 한 방울이라도 들어갔다가는 영영 굳지 않고 묽어져서 칼로 썰리지 않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나는 재작년에 이 비극을 경험했기 때문에 올해도 물을 조심하였으나 의외의 장소에서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여러 초콜릿 중 하나에 우유를 너무 많이 넣어 지나치게 말랑했으며, 잠시 비닐장갑을 망각하고 코코아가루를 쏟아 손톱사이에 초콜릿의 잔재가 다 껴버린 것이다. 엉망진창인 손톱을 씻느라 용을 쓰며 매년 색다르게 실수를 하는 내가 참 재주가 없다고 생각한다. 항상 작은 실패를 맛보기 때문이다.

 

나는 초콜릿을 만드는 시간동안 수많은 번민에 빠진다. 그것은 마치 홍수처럼 나를 휩쓸고 간다. 전자레인지와 냉동실 칸 그 너머로 아득하게 멀어진 인연들을 하나둘씩 상기한다. 내가 놓쳐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내가 상처받은 날과 상처를 주고야 말았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초콜릿을 젓고, 붓고, 자른다. 초콜릿 하나에 후회를, 초콜릿 하나에 미움을 자르며 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그리하여 완성된 초콜릿은 매우 달콤하여 슬픔을 위로해주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가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내게 있어 매년 초콜릿 만들기는 취미 그 이상을 넘어 나를 달래는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

올해는 친구들에게 주고자 초콜릿을 대량생산했다.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을 봉투에 담아서 신과 보노, 용이를 만났다. 우리는 앞서 정해진 일정을 수행하느라 초콜릿이 내 손 안의 봉투에 계속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평소에 나는 가방이 있음에도 손에서 봉투가 떠날 날이 좀처럼 없었으므로 친구들 사이에서 보부상으로 알려져있었다. 그 명성 덕분에 그들은 내 손 안의 초콜릿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초콜릿을 주자, 그들의 눈가에 놀람과, 기쁨과, 당혹감이 퍼져나간다. 나는 그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좋아한다.

 “이건 언제 만들었어!”

보노가 말했다. 그녀는 초콜릿을 만들게 된 경위가 몹시 궁금하다.

 “어떻게 만든거야? 알려줘. 어떻게?”

신은 초콜릿을 만든 과정을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초콜릿을 직접 만들다니! 너무 대단해! 능력자 아니야?"

용이는 언제나 나를 과대칭찬의 늪에 빠뜨린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반응에 나는 정신이 없다.

그들은 신기하다듯이 초콜릿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수많은 질문을 한다.

 저마다 각양각색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내용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멋지고 대단한 초콜릿’이라는 뜻이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와 애정표현이다. 언제나 나로 하여금 이 우주를 통들어 나만한 사람이 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들 사이에서라면 그 어떤 쇼콜라티에보다도 초콜릿에 관해서 통달한 장인이라고 믿게 되며 자동으로 콧대가 하늘 깊숙이 찌를 줄 모르고 커진다. 뿌듯함과 만족감이 차오른다.

 이렇게 조용하지만 열렬한 환호를 지켜보며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들의 애정 속에서 숨쉬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 짧은 환희를 선물하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초콜릿을 만들어왔음을.

 아아.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다. 미움과 혐오가 가득찬 내 마음속에서도 끝끝내 사랑을 찾으려고 애를 썼구나. 여기에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랑의 실체였다.

 삶을 껴안아주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후회와 아쉬움에 잠기기에도 더더욱 부족한 삶이다. 그저 잊고 그리워하고 그대로 품고 갈 뿐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생을 찾아 가야한다.

 지금 이 시간, 여러 사람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공중에 부딪히고 기름냄새가 찌들은 동네 치킨집에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서로의 소식을 나누는 모습을 온 마음을 다해 귀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언제까지나 그들이 평안하고 또 평안하기를 빌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느 가곡의 가사가 떠오른 탓이다.​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그 시간에 기댄 우리

 

- 시간에 기대어 (고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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