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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Apr 26. 2024

조건없는 마음

넴릿

'얘는 귀가 길고 털도 길고 색깔은 내가 좋아하는 마요네즈! 낄낄, 이게 코커스패니얼이구나. 코~커스패니~얼.'

'슈~나우저, 슈나우저 얘는 귀가 쫑긋 섰고 꼬리가 짧다. 와, 이거 수염이 길어서 할아버지 같애.'

어릴 적 즐겨 읽던 책들 중 하나가 강아지 도감이었다. 전 세계 100마리 넘은 강아지들이 갓 졸업을 앞두고 찍은 것 같은 사진이 아래로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그 사진 옆에 저마다 견종과 그 종의 특징, 역사, 걸리기 쉬운 질병, 성격, 지식 등 텍스트로 가득 찼다. 텍스트보다 그림이 비교적 읽히기 쉬웠던 어린 내겐 그저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튀어나올 것 같은 강아지 실물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지금의 내 나이는 서른 살. 인간의 나이로 치면 삼십 대쯤 되었을테지만 내 눈에는 마냥 아기처럼 해맑은 세 살 강아지가 있었다. 그 강아지 이름은 두리. 두리와의 첫 만남이 거의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른들은 나의 귀가 되어주고,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소리를 감지하여 알려주는 보청견이 될 준비가 다 마친 강아지 한 마리가 필요했고, 엄마 뒤에 철썩 붙어있던 나는 강아지 도감 속의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사실에 볼그레 상기가 된 채 몸이 빼빼 꼬았다. 강아지들을 관리하는 담당자가 내 모습을 스캔하고, 강아지를 데려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하얀 문 뒤에 등장한 새하얀 몰티즈 하양, 그다음에는 하얀색 바탕에 검푸른 얼룩이 몇 개 있는 시츄 가을, 마지막에 들어온 갈색 토이푸들 두리. 세 마리의 강아지가 돌아가면서 각각 10여 분의 짧은 만남을 가졌다. 곱슬곱슬 볶아놓은 듯한 갈색 털을 가져 마치 꼬순내가 풍기면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던 두리가 유난히 인상 깊었다.

푹푹 찌는 더위 아래 집 앞 놀이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느라 원래 피부색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제법 까무잡잡했던 열두 살의 나와 쏙 빼닮은 것 같았다. 누구도 섭섭할 거 없이 두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빠, 엄마, 나, 동생 한 명 한 명을 향해 뛰어가더니 당신들은 내 거야! 하는 듯이 두 발로 꾹 찍어 눌렀다. 반면에 그런 작은 강아지가 무서워서 질색팔색을 하는 엄마의 유난스러운 모습에 아빠도 나도 동생도 배꼽 빠졌다. 소심한 나와 달리 사람을 엄청 좋아하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는 두리가 끌렸다. 심지어 발음이 어눌한 나도 부르기 쉬운 받침이 없는 이름 두 글자 또한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건 운명의 데스티니.

훈련소를 떠나 장애 도우미견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집에 오게 된 두리는 딩~동 초인종 소리,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삐비비삑 기상 알람 소리, 따르릉 전화 소리, 삑삑 전자레인지 소리가 났다 하면 어김없이 나한테 달려와서 내 무릎에다 두 발로 벅벅 긁어댔다. '저기 소리가 났어. 날 따라와.' 내 귀가 되어주는 두리가 신기하고 기특해하는 엄마와 아빠는 소리 훈련에 틈틈이 매진했다. 두리가 오고 나서 우리 집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소리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거였다. 거실에서 아빠가 부르는 '해솔아~', 부엌에서 엄마가 부르는 '해솔아~', 심지어 작은방에서 동생이 부르는 '언니~' 들려왔다 하면 반사적으로 일어서서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두 귀가 펄럭거리게 총총 뛰는 두리 뒤를 따라 함께 소리 나는 데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 행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때마침 사춘기에 접어들어서 그랬던 걸까, 한껏 삐뚤어진 생각들로 머릿속에 맴돌았다. 예전 같았으면 가족이 날 부르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직접 와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데 얘가 우리 집에 왔더니 어째 나만 불려 다니는 것만 같은 낯설고 불편한 느낌에 오늘도 소리 난 걸 알려주려고 해맑게 달려오는 두리를 괜히 밀쳐내기도 했고, 한동안 벅벅 긁혀도 모른 체도 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었던 두리는 13년 동안 내 곁에 묵묵히 있어줬다.

노년기에 접어든 두리는 이전보다 움직임이 줄어들고, 잠자는 시간도 늘어난 게 단연 눈에 띌 정도였다. 몇 주 내지 한동안 걷지 못하고 누워지내던 두리는 어느 날 해 뜨기 직전 내 품 안에서 큰 숨을 서너 번 쉬더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강아지들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보다 먼저 운명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내 곁에 있는 강아지가 어느 순간 내 곁을 영영 떠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아마 두리에게도 어쩌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두리의 마지막 말이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두리만 생각하면 눈물이 순식간에 차오르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고 그렇게 삶에 치여 낭만을 잊어 그 기억들은 꽤 많이 흐려졌다. 두리와 함께 풀내음새가 코 끝에 싱싱하게 닿으며 뛰어갔던 상암의 하늘공원이 그립다. 나와 두리가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 나를 더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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