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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Jul 08. 2024

여름에 사는 눈사람

빵호

누군가가 여름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한여름의 습한 더위는 나를 바짝바짝 마르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다. 커피든 음식이든 옷이든 차갑고 시원한 것만을 찾는 나를 보고 전 애인은 눈사람이라고 불렀다. 그 순간부터 나는 눈사람이 되었다.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땀을 줄줄줄 흘리고 있노라면 전 애인은 “또 눈사람이 녹고 있네.”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나도 더위 엄청 타는 체질”이라며 내게 공감을 시도했지만 나를 능가하는 사람을 여지껏 보지 못했다. 그 사람들과 밖에 나가서 조금만 걷다보면 보여주는 반응이 재미있을 정도다. 십분 만에 금세 땀범벅이 되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정작 뽀송뽀송하며 그 표정은 경악에 가득차있다. 그럼 나는 거봐, 하고 샐쭉 웃는다.

 

현대 제약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나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땀을 막아주는 각종 의약품 덕분에 나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더울 뿐인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다.  약을 바르며 철저하게 관리해왔으나 유일하게 대비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손수건이 없을 때다.

 

유월의 어느 날, 여권 사진을 찍기 위해 집 앞 사진관에 갔었다. 분명 사진관 사장님은 여름의 신에게 축복받은 체질임이 틀림없다. 사진관은 내게 매우 습하고 더웠다. 에어컨이 켜져있으나 넓은 실내를 꽉 채우기엔 부족한 냉기였다.

 

난 당연하게도 도착하자마자 땀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선선한 날씨에 사진관도 집 앞에 있으니 손수건이 없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집에 두고 온 나의 판단 착오였다. 대기실에 있는 선풍기로 어찌어찌 땀을 말리고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 카메라를 들려다 흠칫하고 나를 보았다.

 

“땀 닦아주셔야 할 것 같아요. 얼굴이 번들거리면 안 돼서요.”

 

아차! 아직도 땀이 남아있었나보다. 이번에 나는 피부의 모든 땀구멍을 바싹 말릴 각오로 에어컨 앞에 섰다. 그러고는 휴지로 연신 얼굴을 닦았다. 에어컨 바람을 쐬니  몸에 팽팽하게 갇혀 있던 열기가 가라앉는다. 문득 인터넷에서 보았던 최초의 에어컨 발명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업적으로 영원히 칭송받으리란 것을 예견했을까? 그의 발명은 여러 시대를 거쳐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만난 적도 없는 그에게 절을 수만배 올리고 싶은 심정으로 자리로 돌아가 자세를 잡는다. 어깨를 내리고, 턱을 집어넣고, 눈을 크게 뜨고!

 

이번에도 사장님이 엉거주춤하며 카메라를 들었다 놓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사장님을 바라본다. 사장님의 입술이 말하고 있다. 거울 한번 보세요. 루즈....? 루즈는 립스틱의 옛말인데? 엄마가 자주 쓰는 말이라 알고 있던 나는 더욱 의아했다. 휴지 때문에 립스틱이 얼굴에 옮겨묻었나?

 

후다닥 대기실로 가서 거울을 본다.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마, 눈썹 위, 코, 뺨, 턱 온갖 곳에 휴지 조각이 붙어있었다! 이대로 사진을 찍었다면 바보같은 얼굴이 십년 간 여권에 박제되었을 것이다. 여러 나라 입국장에서 “you same? same?” 하며 의심하는 상황이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었다. 물론 애초에 사진관에서 그렇게 둘 리 만무하지만, 사장님이 카메라 렌즈 너머로 엉망진창인 얼굴로 스스로 의자에 앉아 진지하게 자세를 연구하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이 곳에서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다.

휴지로 땀을 닦을 때부터 이 상황을 예측했어야 했다. 사진관의 얇디 얇은 2겹 휴지로는 어마무시한 땀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니... 갈기갈기 찢어진 애처로운 휴지의 희생에 묵념하기는 개뿔. 주체할 수 없는 민망함에 서둘러 휴지를 떼어내며 나도 모르게 외쳤다. “하.하.하. 휴지를 말씀하신거구나!”

가만히 수습이나 할 것이지 굳이 왜 밖에다 말한것일까. 내 부끄러움을 공공연하게 알린 셈이었다. 정말이지 잊고 싶은 순간이다.

 

이렇듯 눈사람은 지금까지 땀 때문에 곤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땀을 조정하는 것은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체념하게 되었다. 그저 대비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의 공존 방법을 터득했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불허다. 항상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방심하는 순간에 일은 생긴다. 그래서 눈사람은 특히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여름을 싫어했다. 눈사람에겐 여름이란 대책 없고 무방비함 그 자체이며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계절일 뿐이었다.

 

하지만 눈사람을 이루는 모든 역사는 여름에 시작되었다. 수영과 프리다이빙을 통해 깊은 물 속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극복하고 심신을 단련케하는 것도 여름에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얼룩덜룩한 피부를 노출함으로써 내 결점을 직면하는 것도 여름이니까 할 수 있다. 그리웠던 이에게서 오랜만에 온 안부 연락에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일축하 인사에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때도 여름이다.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엄마의 자궁에서 나와 태초의 울음을 터뜨리던 날도 여름의 초입이었다. 그래서 여름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여름은 매년 고작 삼개월 머물다 갈 뿐인데 환영받지 못하는 여름이 가여워졌다. 그러니 여름이 주는 모든 것을 그대로 느껴보려 한다. 어느 날 다이빙을 하다 뭍으로 올라와 숨을 고를 때 두 눈 가득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원망하고 원망하다 지나고 나면 결국 또다시 여름을 갈망할 것이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누군가 여름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망설이다 ‘그렇다’고 말할 것만 같다. 그래서 눈사람은 결심했다. 다시 여름에 권태를 느끼는 순간이 와도 견디어내보자고.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면서 강렬한 태양의 온도보다 더욱 더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되면 여름 해를 폭 감싸안아도 많이 녹지는 않을테니까. 여름을 품은 따뜻한 눈사람이 되자. 여름의 색, 느티나무의 초록색, 하늘의 파란색, 해바라기의 노랑색이 덕지덕지 묻은 알록달록 총천연색 눈사람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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