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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Feb 26. 2024

오 나의 구세주

넴릿

삶이 팍팍하게 찌든 사회인들이라면 다 공감할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토요일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이리저리 치이느라 몸이 지칠 법도 한데 그 하루를 용케 보내는 방법이 각양각색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토요일에 서서히 눈이 떠지더니 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눈곱 떼기도 전에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열었다. 오늘은 날씨가 어떨까? 춥진 않으려나?


[ 아침 최저기온: 7~17도, 낮 최고기온: 20~23도 ]


생각보다 낮지 않은 기온을 확인하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한 쇼핑몰에 체험단 신청을 했는데 당첨돼서 받은 치마가 있었지?’ 가을에 잘 어울리는 생지 데님으로 되어있고, 치마 오른편에 조그마한 립밤마저 잘 안 들어갈 것만 같은 깜찍한 주머니가 달려있다. 배송받자마자 착용해서 리뷰를 올려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전신거울 앞에서 패션쇼에 온 것처럼 포즈를 척척 취하면서 딱 한 번 입었다. 하지만 그 치마는 수많은 이유로 거절당하고 밖으로 나서지 못한 채 구석진 서랍에 방치되었다. 그렇게 사계절이 한 바퀴 지나갔던 것 같다.


이 날따라 무슨 자신감이 올라왔던지 그 치마가 서랍 밖으로 나섰다.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한발 한발 걸어갈 때마다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에 어색해져 자꾸만 괜히 치마 끝자락을 잡아 끌어 내려보곤 했다.


약속대로 동네친구이기도 한 남자친구와 타코 집에 들어갔다. 각자 바쁜 일상을 지내다 일주일 만에 상봉해서 그런지 나는 닭가슴살 샐러드를, 그는 그릴새우 샐러드를 앞에 놓은 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따리를 푼 것처럼 늘어놓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계속된 말다툼에 어느 순간 이성은 온데간데없고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감정만 내세우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내심 마음이 불편해졌던 걸까, 앉아있으면서도 애꿎은 치마를 계속 잡고 끌어내리곤 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야속하게도 미룰 수가 없었던 다음 스케줄이 코앞으로 다가와 어쩔 수 없이 냉랭해진 분위기와 함께 그대로 움직였다. 이동하던 중 내 눈에 불쑥 들어온 한 의류매장이 있었다. “나 잠깐 저기 들러서 뭐 좀 살게.“ 그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삐 움직이는 두 눈, 갈피 못 잡는 손, 어쩔 줄 모르는 발걸음 끝에 따뜻해 보이는 코듀로이 팬츠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제발 핏이라도 맞아라, 간절한 마음으로 탈의실 안에서 후다닥 갈아입었다. 하지만 다시 벗고 그 치마를 도로 올려 입었다. “핏이 별로야. 그냥 서둘러 가자.”


지하철에 침묵을 싣고 반 바퀴나 한참 달려서 건대입구역에 도착했다. 무심코 시간을 확인해 보니까 20분가량 남았다. “저 앞에 롯백 잠깐 들르자. 거기 유니클로 있대.” 이번에는 데자뷔같이 흑청 일자 팬츠와 화이트 플레어스커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벗었다. “이게 무슨 일자야. 스키니진인 줄, 스커트는 프리사이즌데 왜 또 허리가 큰 거야. 다 별로야. 늦었다. 빨리 가자.”


빠른 걸음으로 앞에 가던 나와 내 뒤를 묵묵히 따라온 그가 불편한 기색을 숨긴 채로 약속 장소에서 금발머리의 친구를 반겼다. 날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지, “이야~ 치마 입어서 그런지 언니인 줄 몰랐잖아. 너무 예쁘다 언니.” 그 말을 들은 내가 씁쓸한 미소만 띠었다.


돌이켜보면 도대체 그 치마가 뭐라고, 하루 종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만 같았다. 오르락- 내리락- 들떴다가도 느낄 틈도 없이 확 가라앉기도 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 감정 상태가 그러한 거였는데 그걸 선뜻 인정하기는 싫고,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가 미워죽겠는데 더이상 불필요한 감정싸움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땐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살다 보면 이론이 언제나 먹히지 않을 때도 있지 않는가. 앞선 생각과 반대로 마음속 응어리는 부글부글 끓이다 못해 계속해서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뻔했으나, 어느 순간 그 치마는 내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저 죄 없고 말도 없고 가장 만만하다는 이유로. 그럼에도 날 부웅 띄워주기도 하니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오 나의 구세주라고 표현하면 이상할지 몰라도 나는 그 치마 덕분에 하루를 무사히 넘겼구나.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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