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망구엘, <나의 그림 읽기>
“모든 것이 제대로 생겼는지 보려고 이 거울, 저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의 내 얼굴을 찾는 중이다.”
-W.B. 예이츠 ‘A woman, young and old(젊으면서 늙은 여인)’중에서-
이야기는 시간 속에 존재하고 그림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 쓰인 말은 고정된 공간이나 틀에 머물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체계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림이 하나의 틀 속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의식에 투영되면 어디서 본 듯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사전 지식이나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그림을 대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림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해 해석된 그림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종류의 다양한 이미지들 안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예술 작품뿐
아니라 거리의 광고판까지 우리가 소유했던 아름다움에 관한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든, 언어의
수단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해석이 이루어진 것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미지
혹은 그림으로 스스로를 표현해 왔다.
망구엘은 모든 초상화는 거울과 같다고 말한다. 허영을 비추는 거울이든 영혼의 참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든
모든 거울은 초상화라는 의미가 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적 인식을 갖게 만드는 거울은 우리의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내면을 비추는 지화상이다. 모든 그림과 마찬가지로 우린 초상화의 의미를 자신의 지각과
경험 속에서 이해한다. 초상화를 들여다보면 주인공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초상화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자 또 다른 창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은 우리 자신을 꾸밀 때 사용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이기보다 감추고,
스스로 거짓된 이미지를 만들어 자신을 속이며 외부 세계와 관계 맺을 때 유리한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살아간다. 사실 우리 본래의 모습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성 August는 우리를 비쳐 주는 궁극적인 참 거울은 성경이라고 말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비참한 데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분의 빛이 우리의 참모습을 드러내 줄 것이고 자신의 결점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혐오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자신의 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화가들이 한두 점 자신의 모습을 남겼는데 렘브란트는 일생 동안 수많은 자화상을 그리거나 스케치했다.
그 이유가 궁금하고 작품의 가치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 <바로크와 나의 탄생>을 찾아보았다.
몽테뉴가 <수상록>의 서문에서 자신의 글을 하나의 자화상에 비유했듯이 렘브란트는 자신을 '숨김없이
그대로' 그렸다. 뒤러를 비롯한 화가들이 자신을 이상화한 모습으로 그린 것과 달리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상태를 표현했다.
종교개혁 후 그림이나 조형예술의 주 고객이었던 교회나 귀족을 만족시키는 목적이 사라졌다. 화가가 스스로
자신과 마주해서 내면을 들여다보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화상 작업은 예외적이고 독보적이다. 신의 눈을
의식하고 신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용기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젊어서 성공한
자신감 넘치는 청년부터 자신의 그림 그리는 일과 삶에 대한 고뇌가 비치는 중년의 모습, 그리고 죽던 해의
자화상도 있다. 화려한 겉옷, 모자, 색조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다. 신 앞에 선 인간의 부끄러움과 구원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자화상은 기술적인 면에서 다양한 인간의 성격과 감성과 기분의 표현 방법을 탐색하는 작품군에 포함
된다. 마치 자신을 의자에 앉아 있는 모델처럼 생각하고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면서 스스로 모델도 되고
관찰자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을 얼굴의 변화 속에 담아내면서도 자신에 대한 균형감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미학적 가치와 도덕적 의미를 지니게 한다. 렘브란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는 자신이 ‘바라보고자’하는 주관적 해석과 실제 모습(객관적)이 뒤섞일 수밖에 없다. 주관과 객관이 혼재된 자화상의
이미지는 ‘나’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남’을 위한 것이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화가를 향하지만 캠퍼스 안 모델이 바라보는 시선은 타자를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는 하느님을 ‘인간의 자의식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자의식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형상만 가득 비치게 될 때, 존재와
반사된 이미지가 하나가 되어 나타난다"라고 주장했다.
액션페인팅으로 알려진 잭슨 폴락은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지만 그림과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기 위해
캠퍼스를 바닥에 펼쳐 놓고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그림과 더욱 밀착될 수 있고 그림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나는 캠퍼스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사방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림 안에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이는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서부 인디언 예술가들의 방법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림의 주인공, 화가, 그리고 관찰자는 이런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된다.
”만일 모든 초상화가 관찰자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관찰자는 그 초상화를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우리는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더 한다. “
(반사의 이미지’ p.26)
망구엘이 렘브란트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노년에 접어든 그의 자화상이야말로 영원한 관찰자인
신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낸 최고의 초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의 그리
밝지 않은 빛 속에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할 때 자기를 보는 또 다른 눈을 느끼게 되니 가장
진실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는 진정한 거울이 되어야만 할 터이다.” -보르헤스.-